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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Jul 25. 2023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방관일지 EP.9

    처음 글을 쓰게 된 건 우연이었다. 입에 꾹꾹 담아둔 채 하지 못한 말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던 종합장이 꽉 찰 때까지 적어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깨알 같은 글자와 자그마한 낙서들. 알 수 없는 도형과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써보자. 어디에 올리거나 제출하는 소설도 아니었다. 그냥 순수 자기만족을 위한 글쓰기였다. 그게 내가 글을 쓰게 된 첫 번째 계기였다. 


    두 번째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도피였다. 나는 항상 웃는 사람이었다.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버팀목이 되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누군가의 옆에서 웃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어떻게 힘든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땐 정말 아무런 계산도 없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처음으로 가진 진지한 꿈이었다. 누구든 고쳐주고 싶었다. 세상에 이유 없이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세계를 떠돌며 아픈 이들을 봐주고 싶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도 웃었기에 정작 나를 돌보지 못했다. 슬퍼도 괜찮다며 웃었고, 힘들어도 괜찮아질 거라며 웃었다. 당시 하루에 2시간을 겨우 자거나 대부분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버렸다. 남들 다 신형 스마트폰으로 바꿀 때, 2G 폰으로 바꾸고는 FM 라디오만 들으며 살았다. 살고 싶어서 세상 바라보는 것을 포기했었다. 그렇게 늘 괜찮다며 다독이기 위해 적어둔 말들이 하나씩 모여 어느새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쓰게 된 건 적개심이었다. 가볍게 살아온 나 자신이 개탄스러웠다. 왜 자꾸 내 주변에 있는 건 빛을 잃어가는지.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져가야 만족할 건지 알 수 없었다. 관계를 잃고, 청각을 잃고, 다음으로 시각을 잃었다. 맛도 점점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더 이상 주변에 숨기는 것이 어려워질 때쯤. 거짓말처럼 또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밤 타는 듯한 통증을 몰고 오는 분노. 내게서 잠을 뺏어가는 슬픔과, 입에 무언가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하게 무너진 내 상태가 한순간에 하나로 뭉쳤다. 자기 방어로부터 시작된 악의.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많은 생각들이 전부 악의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행했을 때, 가장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되어 글을 마주하는 자세가 180도 변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언어의 힘. 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치유력. 글에서 더 나아가 창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퍼트릴 수 있는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대부분 카타르시스를 쾌감이나 희열 같은 극적인 전율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이건 조금 틀린 상식이다. 카타르시스는 창작물을 마주하는 독자내면에 방치된 채 곪은 상처를 픽션의 비극을 통해서 직면하고 비로소 하지 못했던 슬퍼함을 통해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특정 창작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 전율은 내 목표가 되었다. 처음 그 작품들을 봤을 땐 정말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경의로움을 느꼈다. 인물들이 슬퍼할 땐 가슴이 시큰거렸고, 인물들이 행복해할 땐 함께 웃었다. 마침내 작품의 종지부가 찍혔을 땐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벅찬 감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조차 바꿔놓았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내 손끝에서 만들어진 인물들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서. 나로 인해 비극을 안고 살아가던 주인공이, 나로 인해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게 되는 걸 보고 싶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아픈 사람들이, 언젠간 부디 나의 작품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바라며.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인물에게 몰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 속 인물도 사람이다. 그들도 감정을 가지고 있고, 내가 부여한 사건을 마주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마침표를 찍어 작품을 끝낸다 해도 그들은 작품 속 세상에 살아 있다. 내가 만약 이런 사건을 마주했더라면, 내가 만약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면. 그때의 감정. 특정 감정을 느꼈을 때의 시선과 주변 환경.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 심지어 어떤 장소에서 맡을 수 있는 후각적 요소와 귀를 쫑긋 세워 들을 수 있는 소리까지. 내가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라고 생각하면서 몰입해 본다. 만약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그 분야에 이론적인 부분으로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까지 공부를 하며 부족한 점을 채우려고 한다. 내 글이 많이 부족하고 자랑할 수 있는 글은 아니더라도, 직접 만들어낸 인물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하다. 지금까지 창작한 각기 다른 인물들은 전부 나 자신의 일부이며 글 속에 우직하게 남아 있는 의리 있는 친구들이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나 자신이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해가며 울고 웃을 때.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내 옆에 있던 게 글 속 인물들이니깐. 


    나는 글을 쓸 때 제일 먼저 마음을 가라앉힌다. 절대 신난 상태로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쓰기 전에 심오한 작품을 보고 키보드 앞에 앉으면 더욱 좋다. 두 번째는 이어폰으로 빈틈없이 귀를 틀어막고는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한다. 반복할 때 감고 있는 시간을 점차 늘린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들으면 안 된다. 절대로. 이어폰으로 귀만 막는다. 세 번째는 감정이 무겁게 내려앉으면 가장 힘들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가장 슬펐을 때. 가장 괴로웠을 때. 가장 아팠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 가장 잊고 싶었던 때.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그날 떠오르는 부정적인 것들을 차례로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온통 검게 물들이고 나면 놀라울 정도로 정갈해진 문체를 마주할 수 있다. 쓰는 동안에도 그때의 감정을 잊지 않으며 글을 써내린다. 감정을 선명하게 떠올릴수록 쓰고 있는 인물에게 잘 녹아들 수 있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 정도 잘 풀리기 시작하면 그날 쓸 글 분위기에 맞는 곡을 선정해서 들으며 글을 쓴다. 


    창작에 몰두하는 시기에 유난히 악몽을 많이 꾼다. 글을 쓰는 건 재미있고 좋지만, 반대로 힘들고 답답한 모순적인 감정도 함께 느끼게 된다. 그래도 단단한 글을 쓰고 싶어서 늘 트라우마와 마주 한다. 웃으며 글을 쓸 수 있는 그날까지. 웃을 수 있게 된다면 더 나아가 행복한 내일을 그리며 쓸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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