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에서 분노로, 슬픔에서 무감각에 이르러서야

나의 계약해지 일지 #9

by Note for journey

외국인 파트너들 앞에서 나를 ’strong woman’, ‘powerful lady’로 소개할 때, 출장팀 회의 중 나에게 ‘이 팀장은 늘 말투가 그런 식이야’라며 논의를 이어가던 내 말을 끊고 소리를 칠 때, 나는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화가 났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다른 얼굴을 할 수 있지? 처음 그 사람과의 계약 종료를 생각했던 시기의 나는 모멸감과 분노에 의해 움직였다. 모멸감에서 비롯한 분노는 나를 많이 채근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나의 옳음을 그리고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기에 누군가의 한 마디, 한 마디 지나치는 소리에도 곤두서있었다. 몇 주 사이 나는 모든 잘못된 판단의 책임을 끌어안고 걸어간다.


슬프고 무기력한 시간이 계속됐다. 내가 내리는 판단이 옳은 지 그른 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직업인으로의 자아도, 그리고 인간 본연의 자아도 무너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서 걱정하여 던지는 무수한 염려들이 날카롭게 내 마음 깊은 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몇 주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이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습관이 되었지만, 그 습관이 가져오던 감정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모든 감정은 그렇게 무뎌지는구나. 하긴 무뎌지지 않으면 삶을 마주하기 어려우니까.


나는 삶을 늘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한번 주어진 삶이고, 지나가버리면 없어지는 순간들을 오롯이 그리고 충분히 살아내는 게 내 인생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감정의 진폭과 진화의 시간을 지나면서 삶은 견디는 것, 그리고 버텨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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