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일 합니다"
<세상 끝과의 조우>의 괴짜들
다큐멘터리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는 2007년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초청으로 군용기를 타고 남극 맥머도 기지에 도착한다.
거대한 탄광촌과 비슷해 보이는 얼어붙은 맥머도 기지...... 이곳은 그의 새 다큐멘터리의 베이스 캠프다. 남극의 풍광도 담을 것이고, 각기 다른 사연으로 이 남극을 찾아 들어온 괴짜들 이야기를 담기 위해 충분한 메모리도 준비했다. 다큐멘터리 <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 세상 끝과의 조우> 이야기다.
2미터 두께로 얼어붙은 활주로에 군용비행기가 내리는 순간부터 헤어조크 감독의 호기심 넘치는 카메라를 통해 엿보는 남극기지의 삶은 흥미롭다. 헤어조크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면서 ‘또 다른 펭귄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고 말했었다. 남극의 극한 상황과 싸우며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궁금했고, 무엇보다 그들을 그토록 매료시키는 것이 남극의 무엇인지 궁금했다.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창고처럼 보이는 남극기지지만, 라디오방송국, 에어로빅 강습실, 요가교실, 자동인출기까지 갖추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창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생존교육인 해피캠퍼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선 얼음집인 이글루 만드는 법을 배우는데, 불행하게도 그날 밤은 자기가 만든 이글루에서 자야 한다. 손가락 발가락이 멀쩡한 것으로 위안을 하면서 말이다. 일년에 네달은 해가 지지 않는 남극. 두 팀으로 나누어 실시하는 해피캠퍼 프로그램에는 천지가 하얗게 보이는 현상에 대비하는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남극에서는 수시로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눈보라가 심하고 춥고 피부 노출로 인한 동상 때문에 서있기 힘들게 되면 가시거리가 엉망이 되어. 온통 백색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비하는 것. 정교하게 고안된 모의실험 장치는 다름 아닌 흰색 휴지통을 뒤집어 쓰는 것이다. 하얗고 안보이고 안 들리니 효과만점. 이동범위는 막사에서 출발해서 화장실 옆의 교관을 찾아 가는 것이지만 쉽지 않다. 특히 리더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모두 길을 잃게 된다. 교관은 멀리서 보고 있다가 길에서 벗어난 것을 알려주는데, 보이지 않는 이 짧은 길을 나란히 헤쳐나가기란 힘겹기만 하다.
헤어조크의 카메라에 담긴 남극의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 출신이면서도 공통적으로 순수하고 열정적인 괴짜들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전직, 현직 이렇게 두 개의 직업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요즘 흔한 말로 본캐와 부캐다. 그들이 맡고 있는 일은 전직과는 무관한 또 다른 모험인데 나름 전문적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른 분야의 전문성도 꽤 잘 따라잡는다. 대부분 먹고 살자니 이러 저러 해서 못 이루었던 꿈들이어서인가? 괴짜들은 한껏 신바람이 났다.
전직 영화제작자는 요리사로 근무하며 자기가 만든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기지 전체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쓰레기차를 타고 전 세계를 탐험하던 전직 여행가는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하며 틈틈이 화물칸에 짐으로 가장하여 저렴하게 여행하는 비법을 동료들에게 전수하기도. 전직 언어학자는 영하 20도의 남극에서 싱싱한 토마토를 재배한다. 할머니가 밤마다 읽어주던 일리아드 오디세이 이야기를 들으며 모험의 꿈을 키우던 어린이는 이제 과테말라 민간단체를 거쳐 남극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 운전사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남극에서 자신의 임무를 즐기고 있다. 공상과학소설 매니아인 세포학자는 바다에서 흥미로운 신종 생명체를 발견한 날이면 같은 팀 동료들은 무서운 지구 종말에 대한 공상과학을 보거나 기타 콘서트로 자축한다. 웨델표범 연구원은 남극의 고요함에 푹 빠져있다. 밤중에 얼음 위에 서서 그 완벽한 정적 속에서 듣는 자신의 심장소리, 얼음이 깨질 때면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것처럼 여기 저기 금 가는 소리. 얼어붙은 바다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바다표범소리가 마치 핑크플로이드 음악 같다며 남극이 선사하는 감각의 세계를 만끽한다.
그렇게 헤어조크 감독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와 동시에 예상치 못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조우한다. 사람들과 말하기를 몹시 귀찮아하는 펭귄학자 에인리 박사에게 계속 말을 시키기 위해서 엉뚱한 질문을 계속하던 헤어조크 감독은 방향감각을 잃는 펭귄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어코 무리를 탈출해서 먹이의 반대 방향에 있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외로운 펭귄과, 그 펭귄의 진로를 막아서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즐거워 보이는 남극의 하루 하루지만 사실 목숨을 건 사투이기도 하다. 각자 맡은 임무는 공통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는 일. 영하 2도의 얼음물 속으로 매일 잠수하는 세포학자는 밧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침반도 사용할 수 없다. 자기극이 가까워 바늘이 위아래만 가리키기 때문이다. 돌아온 구명을 찾지 못하면 얼음에 갇히기에 떠도는 우주 비행사와 같은 운명이다.
인간은 눈을 통해 우주를 인식하며 귀를 통해 우주의 조화의 음악을 듣는다. 우주의 영광과 장엄을 목격하는 유일한 목격자이고, 시인이며 과학자이며 관찰자이며 그렇게 우주의 아기가 된다. 인간의 호기심의 대가로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땅 끝이라 여겨지는 남극에서조차 아름다움과 환희를 만끽한다. 헤어조크의 이 다큐멘터리는 땅끝과의 조우가 다시 새로운 땅으로의 출발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무대인 로스해 지역은 약 100년 전, 스코트와 셰글턴과 아문센이 남극점 탐험을 위해 베이스 캠프를 차린 곳으로, 맥머도 기지 옆에는 섀글턴이 사용한 오두막이 아직도 폐쇄된 슈퍼마켓 같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밀려오는 감정은 깊은 감사다. 카메라를 든 붉은 옷의 섀글턴 사단이 우리에게 보낸, 남극에서의 편지, 픽션보다 강한 인간의 드라마.
극한의 수행, 그 숭고함에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