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잘 웃지 않는 도시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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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는 익숙해질 만할 때 떠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런던의 마지막 날 사진은 늘 같은 창 앞 책상에서 마시던 커피잔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 이 아침 창과 커피도 기록했었나 보다. 일주일 동안 운이 좋았다. 늘 비가 내린다던 런던에서 햇살 가득한 일주일을 보냈다.


마지막 날 공항으로 떠나기 전, 홈즈 뮤지엄에 갔다. 셜록 마니아인 나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장소다. 초등학교 때 어린이용 버전으로 읽은 코난 도일은 루팡, 이후 추가된 포와로와 함께 나의 성장기를 지배했다. 추리소설은 다 좋아하지만, 정작 셜록 홈즈, 루팡과 포와로는 전혀 다른 캐릭터다.


셜록이 신경질적인 내적 트라우마의 페르소나라면 루팡은 신비한 악인이며 포와로는 서사의 속도가 느리되 인간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셜록의 사람이다. 어떤 인물이 맘에 드는가는 독자와의 케미인데, 나는 셜록이 귀엽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홈즈 뮤지엄에 도착했다. 221b 베이커 스트리트! 드디어 셜록이 왓슨과 마주 앉아 있던 거실로 올라간다. 비 오는 창가에서 책을 읽거나, 낮에 만난 의뢰인에 대해 이야기하던 거실에서 셜록은 대부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었다.


몸을 움직이기 조차 어렵게 붙어 선 빼곡한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맨 뒤에서 설명을 들었다. 우측엔 셜록과 왓슨의 저녁 테이블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도자기의 테이블 세팅, 하숙집 여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꽃무늬 접시, 아무리 닦았어도 세월을 짐작케 하는 은 식기......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내 앞에 바짝 붙어 서있던 관광객이 가방에서 무엇인가 꺼내려는지 팔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순간 나의 핸드폰이 다이닝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영화에서 보면, 순간 정지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영화처럼 지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내 머리 안이 그랬다. 모든 사람이 돌아보았다. 역시 영화처럼 천천히 슬로 모션으로. 소더비 경매에서 홈즈 뮤지엄의 접시 경매 장면도 환영처럼 돌아갔다. 망치를 내려치는 순간 마이크를 든 검은 정장의 남자가 말했다.


“30만 파운드!”


접시가 깨졌는지 두려워 내려다보지도 못하고 나를 향하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마주 보았다. 그때 직원이 접시를 확인하지도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관광객들도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나는 접시가 깨졌는지, 깨지지는 않았더라도 모퉁이가 나갔는지 살폈다. 식은땀이 흘렀다. 테이블이나 바닥에 있을 파편도 찾아보았다.


다행히 접시는 무사했고, 나의 핸드폰은 책과 영화에 나오던 고풍스러운 잉글랜드 명품 도자기 수프 그릇에 누워 있었다. 설명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음 장소인 위층으로 이동했다. 직원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빠른 눈으로 상태를 살피고는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정말 미안해요. 핸드폰이 떨어져서 그만......”

“괜찮아요. 무사해요.”

“미안해요.”

“홈즈 씨가 봤으면 당신 총 맞았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벽에 총을 난사하던 홈즈 이야기다. 실제 거실 벽에 총알 자욱이 도처에 있었다. 3초쯤 살짝 웃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많이 웃은 런던 사람이다.


기념품숍에서 책과 기념품을 사면서 카운터에 있던 홈즈의 명함을 가져왔다. 즐겨 읽는 책의 책갈피로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뮤지엄 직원의 무뚝뚝한 유머 뒤 신중했던 배려를 떠올린다.


런던이라는 도시도 떠올린다. 아침이면 서둘러 달려갔던 수많은 미술관들, 지독히도 아름다웠던 딘트 서점이 아른거린다. 도시의 유령처럼 옛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도시다. 이민자들의 카레 향과 떠들썩한 펍의 웃음소리가 섞인 골목길을 지나 친구의 기숙사로 돌아오던 튜브의 축축한 잿빛 냄새도 그립다.


결코 눈을 맞추지 않는 무뚝뚝하고, 시니컬하고, 웃음이 적은 런던 사람들이 나는 좋았다. 셜록을 좋아하듯 이 도시에 대한 편애일 수도 있다. 평소에도 늘 웃고 친절하지만 겉도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은 왠지 프로그래밍된 AI 같다. 기대치를 낮추어 누구나 나에게 불친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 다감한 사람이 고맙다. 이런 마음이 낯선 도시 사람들의 불친절에 예민한 여행자에게는 편한 세팅이라는 생각도 든다.


런던이 너그럽게 무료로 개방해준 미술관, 작은 질문에 자세한 설명과 함께 아이패드를 열어 수집한 자료들을 보여주던 백발의 할머니 도슨트, 주렁주렁 짐을 든 나에게 기꺼이 텐트로 만든 가방을 내어 준 버로우 마켓 상인은 혹평의 도시 런던에서 나에게 따뜻함을 준 사람들이다. 그 외 불쾌했던 경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은 바로 잊으려 하니 남아 있는 불편한 기억이 없다. 아름다운 것만 담기에도 여행은 짧다.


여행은 유적지, 아름다운 풍광, 반드시 들러야 하는 맛집, 인스타 명소의 합 보다는 크다 느낀다.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우고, 몰랐던 갈증을 해소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 그 안에는 일생에서 소소하게 지나온 수많은 결정으로 지금에 이른 나를 애도하는 마음도 있다. 그러니 같은 곳을 가더라도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오는 것이다. '여행, 너무 좋았어요!' SNS에 넘쳐 나는 글을 볼 때면 궁금하다. 그는 특히 무엇이 왜 좋았을까. 개인적인 서사에 관심이 많은 개인적 호기심이다.


런던을 생각하면, 그 도시에 초대해주고 일주일 좁은 침대를 너그러이 나누어준 친구에게 고맙다. 분주한 일상 중간 여행자인 나에게 런던의 이곳저곳을 보여준 사람이다. 일하는 중간에도 어디 있는지, 부근 어디를 가보라고 문자를 남겨주었다. 그 끝에는 늘 '거기, 좋아할거야'라고 했다.


다음 런던 여행은 내가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약해 놓고 '휴가 내! 가자!' 하면 바빠 죽겠다, 귀찮다 하면서도 여행 가방 꺼내오면 좋겠다. 그리운 여행지로 같은 벗과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것이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네 삶인 것을 안다. 그러니 꼬깃꼬깃하지만 소중한 나의 버킷리스트에 적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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