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팔 즈음

by 김용현

남원이 고향이다.
일곱 형제의 막내인 아버지의 형제, 삼촌들이
향교동 바닥 주먹이었다.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이는 관택이 삼촌이었다.

별명이 남원 해결사다.
깡마른 체격인데 넓은 어깨와 찢어진 눈은 지금도 무섭다. 그러던 삼촌이 밥만 먹으면
주체 못 하는 입술 사이로 음식물을 줄줄 흘린다.
끌려간 삼청교육대에서 맞았다.
성장한 아버지는 전북여객과 광주고속에서
운전대로 밥을 먹었다.
전라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동서로 질러 다녔다.

내가 한 살 때 5월.
아버지가 광주행 고속버스에 갇혔다.
공수부대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했다.
몇 날을 버텼다. 차창 너머로 군인들이 곤봉으로 도망가는 시민의 머리만 골라 쳤다.
학생, 임산부, 아이들 구별이 없다.
약한 자 아픈 자도 동일하다.
치고 넘어지면 워커로 밟았다.
산자가 산자를 넘어뜨리고 발버둥 치는 생명을 누르고 끊었다.

난 그 시절을 살았으나 어려 모른다.
다만 깨고 문지른 시신의 얼굴 형상을
간신히 가마니에 맞추어놓은 사진을 본다.
훼손이 심해 연고를 못 찾은 넋들이다.
곤봉으로 박살난 머리 조각을 시민들이 주워다가 멍석에 맞춰놓았다. 일그러진 입술과 부서져 갈아진 치아. 터진 이마와 저항하다 뽑혀나간 손톱이 무참했다.

공권력이 대의를 망각한 결과는 그와 같다.
M16 소총을 연사 하면 분당 700발이 나간다.
1분에 700명을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 하나로 쉽게 죽인다. 총을 쥐어준 이에게 총을 겨눈 대가는 대량 죽음이다. 대량이라는 단어가 슬프다. 700의 삶이 무심한 쇳덩이 하나에 효율적으로 죽는다.
죽인 자는 죽인 사실을 감추려 700을 묻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발라 건물을 세웠고 또 다른 700을 군 수송기로 날라 어디론가 버리고 묻었다.

다시 5월 18일이 돌아왔다.
정치는 그때를 추종하는 세력을 기반으로 좌와 우가 나뉘었다. 아직도 북한군을 이 사건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죽인 자들이 죽인 사실을 두려워해 매장했던 그때와 같다.

유가족은 이제 나이 먹고 기력마저 떠났다.
곧 만날 저승에 인연을 그리며
오늘 다 말라버린 눈물을 삼키고 무표정함으로 푸르른 묘지 앞에 서있다.

살인과 사격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그도 푸르른 잔디에서 골프채를 휘둘르며 결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골프장 지하에 700의 넋이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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