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와 견제를 동시에 받는 경력사원의 법칙
여기서 너의 게임은 전혀 통하지 않아!
많은 이들이 오늘도 회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커리어의 성장과 새로운 기회를 갈망한다. 더 나은 회사와 연봉을 꿈꾼다. 이런 고민이 절정에 도달하면 이직을 강행한다.
이직처가 확정되면 ‘새로운 시작’, ‘또 한 번의 도전’과 같은 키워드를 떠올린다. 스스로에게 희망을 예고한다. 반면 내심 낯선 곳에서의 적응이 부담된다. 같이 일할 사람들은 어떨지 긴장도 된다. 특히 경력직은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이 가장 크다.
회사는 점점 경력직을 더 선호하는 추세다. 이미 오피스 게임이 익숙하다. 뉴비보다 적응이 빠르다. 무엇보다 부서에서 즉시 전력감이다. 진짜 이유는 가성비가 좋다는 것이다. 갈수록 활활 타오르는 경력 시장에 넘치는 공급으로 할인율도 높아 싸고 품질 좋은 경력직이 많다.
그러나 이직 뒤에 후회하는 비율은 80%에 달한다. 경력사원 약 35%가 또다시 1년 내에 그만둔다.
신입사원과 경력사원이 1년 내에 그만두는 이유는 다르다. 신입사원은 일단 1년 정도 해 보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적성에 맞는 다른 회사를 찾으려 그만둔다. 반면 경력사원은 1년도 못 채우고 또 이직하면 커리어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최소 1년이라도 꾸역꾸역 채우고 나가자는 것이다. 즉, 경력사원이 입사 1년 만에 그만둔다는 것은, 이미 6개월 전 다시 이직을 준비했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회사는 경력사원이 적응을 못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단순히 적응 실패로 봐야 하는 것일까? 경력사원은 회사에 익숙하고 이미 업무도 잘 안다. 게다가 스스로 원해서 이직했는데 뭐가 문제일까?
새회사의 첫 출근. 팀장님은 부서 동료들에게 뭔가 대단한 일을 하다가 온 사람으로 나를 소개해 준다. 같이 일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대리님, 과장님 하고 불러주며 대우해 주는 것이 내심 흐뭇해진다. 누군가 와서 자기는 아랫사람이니 편하게 대해달라고 하면 기분마저 좋아진다. 잘해주고 싶어진다.
새로운 오피스 게임의 시작! 직급도 올렸다. 연봉도 마음에 든다. 전직장에서 받았던 푸대접과 설움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그래. 여기서 잘해 보자. 실력으로 인정받겠어!‘ 둥지를 틀고 의지를 다진다. 동료들에게도 먼저 친하게 다가가려 노력한다.
새로운 회사 시스템. 업무 절차와 방법. 어떻게 하는 거지? 여기는 처음이라 잘 모른다. 근데 이상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 모르는 것을 물어봐도 대충 알려준다. 적당히 찾아서 하라는 반응들이다. 경력직이라 두 번 물어보기는 꽤나 눈치 보인다.
이전 회사 신입사원 때는 배울 시간도 넉넉했고, 선임들이 잘 알려줬다. 근데 여기는 왜들 이러지? 아무리 경력사원이라도 새로운 회사는 낯설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여러 물음표만을 남긴 채 출근 첫날이 끝난다. 둘째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더미가 날라오기 시작한다.
경력직의 오피스 게임에는 매뉴얼이나 튜토리얼이 따로 없다. 받은 업무들의 아리송한 퍼즐조각을 하나둘씩 맞춰가며 혼자 고군분투해 나간다. '그래. 신입이 아닌 경력이니까. 일일이 다 물어보기도 그렇다. 뭔가 보여줘야 한다. 경력직이니까..'
그렇게 몇 가지 일을 해 나가다 보면, 처음 채용공고를 봤을 때와 면접 때가 떠오른다. '내가 하기로 한 일이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지점에서 경력사원이 처음 고개를 갸우뚱하는 포인트가 온다. 회사 생활 좀 아는지라 업무 배정에 대해 팀장님과 면담해 본다.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팀장님은 적당히 에둘러서 말한다. 지금 배정받은 업무를 익혀야 나중에 다른 것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온 지 얼마 안 돼 잘 모른다.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새회사의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그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이내 수긍하고 만다.
주어진 일이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경력을 살려, 실크로드를 개척하던 아라비아 상인의 마음으로 하나씩 개척해 나간다. 어느덧 동료들의 헬프 요청을 제법 많이 받게 된다. 열심히 이들을 도와준다.
'아직은 새회사 뉴비다.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 그러면 날 좋게 봐주고 인정해 줄 테니까..'
반대로 내가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들은 보통 겉도는 조언 정도를 해 줄 뿐이다. 제대로 나서주는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료들을 도와주던 일들은, 알게 모르게 어느 순간 내 고정 업무가 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잡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로 이 지점이 양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두 번째 포인트다. 시간이 갈수록 이거 점점 이상해 보인다. 경력사원 입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받기보다는 내주는게 더 많은 것 같은 불균형을 느끼게 된다.
풀리는 업무보다 안 풀리는 업무가 더 많아진다. 배우는 것보다 알려주는 것이 많다. 남은 덜하고 나는 더하는 기분이 든다. 바로 불균형을 지각하는 과정이다. 이때부터 불안감이 가중된다. '이상하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반복된다.
아무래도 경력직이라 그런 것일까? 새회사에서 일하며 비효율적이고 다소 후진적인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동료들이 업무를 상의하러 온다. 이전 회사에서는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가끔은 이들이 덜 진화된 크로마뇽인처럼 보인다. 안되겠다. 경력직의 현대문명을 좀 전수해 줘야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직장 얘기를 하게 된다. '전 회사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했었다.' '거긴 나름 이런 게 잘 되어 있다.' 이런 류의 얘기들이다.
이쯤 되면 경력사원도 궁금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동료들에게 풀어놓게 된다. 마음을 터놓는 것이다.
"이 회사는 전표 처리를 왜 이렇게 하나 모르겠다."
"단순 업무는 당연히 자동화해야 하는 거 아니냐?"
"품질 검사 만큼은 이전 회사가 확실하게 했어요!"
이렇게 전 회사와 비교한다. 이는 새회사 동료들에게 강력한 네거티브와 반감을 심어준다.
회의 시간에 경력을 살려 아이디어를 낸다. "지금 저희팀 현장지원 업무는 타부서와 로테이션으로 하면 어떨까요? 전 직장에서 그렇게 해봤는데요. 여러 부서가 관심가져서 현장 반응이 꽤 좋거든요."
경력직의 제안에 나오는 답변은 대개 비슷하다. "저기요. 과장님. 여기 잘 모르시나 본데, 저희도 그거 제작년에 이미 했다가 망해서 중단한 건데요?" 뭐만 얘기했다 하면 이미 다 해 본 거랜다.
머지않아 여러 뒷담이 들려온다.
"전 회사가 그렇게 좋으면 여기 왜 왔대?"
"뭔가 마음에 안 드니까 나왔을 거 아냐!"
"저한테는 벌써부터 선임 행세 하던데요?"
"지가 뭔데 원래 하던 거 막 바꿀라 그래?"
"어디 지 혼자 한번 잘해보라 그래!"
그렇다. 오랜 기간 무리를 형성해 온 원주민들의 텃새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경력사원은 그렇게 이상한 일만 계속 떠맡게 된다. 필요할 때 동료들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던전 탐험은 미로처럼 계속된다.
이직해서 새회사에 안착하고 드디어 그들과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곳은 처음부터 그들의 리그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다른 마을에서 건너온 이방인이자, 견제와 경계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 지점을 인식하는 순간이 세 번째 괴리감을 느끼는 포인트다. 이때는 멘탈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전 회사가 그리워진다. 향수병이 밀려온다. 후회가 솟구친다. 잘못 온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감에 또다시 이직을 생각하며 기나긴 여정을 돌아간다.
신입사원의 튜토리얼과 레벨이 어느 정도 되는 경력사원의 오피스 게임은 기본 설정부터 다르다.
경력사원은 이직이 확정된 후 입사하기까지 시일이 좀 있다. 이 시기 새로운 꿈을 꾸며 전직장의 마지막을 정리한다. 여행도 한번 다녀온다. 같은 시간 새로운 꿈이 될 회사에서는 이미 이벤트가 일어난다.
경력사원이 새로 들어올 팀에서는 게임 환경 설정을 다시 한다. 이를 업무분장이라고 한다. 새로운 사람이 합류하니까 부서에서 업무를 만들어 주는 건 당연하다. 다만 경력사원의 게임은 처음부터 던전을 헤쳐 나가도록 구성하는 것이 암묵적인 법칙이다.
이 업무 분장은 이미 팀원들이 맡고 있던 업무들 중 적당히 빼내서 짜집기 한다. 원래 하던 사람이 나간 자리를 통으로 메꾸는 것이라 말할 테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성과 나고 편한 업무들은 기존 사람들이 나눠가지고, 단물 빠진 씹던 껌에 자신들의 기피업무를 끼워 넣는다.
경력사원에게 주로 배정되는 업무 유형이다.
1. 부서 잡일이나 하기 싫은 기피업무
2. 시간과 노력에 비해 성과 안 나는 업무
3. 아무도 관심없어 안 해도 그만인 업무
4. 금쪽이 마냥 해도 해도 답 안 나오는 업무
5. 원래 다른 사람이 하던 완료각 안 나오는 업무
6. 같이 협업하는 사람들 인성이 바닥치는 업무
7. 헬게이트 열고 던전 속에서 헤매는 업무
8. 출구없는 막힌 골목길 모퉁이 같은 업무
9. 끝까지 하면 망하게 되어있는 시한폭탄 업무
10. 다른 부서의 잡스러운 문의를 많이 받는 업무
이런 업무를 세트상품으로 만들어 경력사원이 새로 오면 앞으로 담당할 업무라며 던져주는 것이다.
꿀 빨거나 핵심 성과를 내는 업무들은 오래 있던 텃새들이 나눠 가진다. 게임에서 전리품이나 보상아이템 나눠 먹는 것처럼. 이미 당신이 오기 전부터 모두 날조되었다는 것을 이제 알겠는가?
특히 경력사원의 직급이 높은 경우, 적응도 쉽고 일하기도 수월할 것 같지만 실상은 오히려 정반대다. 직급이 낮다면 동료들이 대부분 윗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부담 없이 해볼 수 있다. 그러나 경력사원의 직급이 높은 경우, 물경력으로 보일까 봐 아랫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어려워진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저항과 견제를 더욱 많이 받게 된다.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은 새로 온 사람이 자신보다 레벨 높은 상사인 것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원래 하던 것을 바꿔나가려고 하면, 곧바로 저항으로 연결된다. 레지스턴스의 표면적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으나 다 거짓말이라고 보면 된다.
'실은 자신들이 꾸며놓은 판이 흔들려 입지가 떨어질까 봐 본능적으로 두려워서이다!'
결국 경력사원은 허울 좋은 찌꺼기만 받아 든다. 이방인 디버프 가득 머금은 채, 불리한 게임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을 잊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잊지 못하면 비교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철저히 전 회사를 부정하고 디스해야만 이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새회사는 그제서야 경력사원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경력사원의 법칙은 더럽다.. 차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