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맹 Feb 26. 2024

"전 신입인데요!" 면책특권의 유효기간

모든 것이 용서받는 튜토리얼의 유효기간


과연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학생 때는 대부분 모든 것이 용서 받는다. 수업에 지각하면 죄송하다고 하면 된다. F학점을 받으면 다시 재수강으로 세탁할 수 있다. 시험기간에 공부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이다. 어떤 결과가 돌아오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회로 나와 오피스 게임 뉴비가 되는 순간, 용서라는 버프는 사라지고 책임이라는 디버프가 생긴다. 빛나는 졸업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빛이 난다보다는 빚이 된다가 더 가까운 표현이겠다.


회사에 처음 들어오면 새로운 환경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하는 것마다 어설프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익숙함이 더해지고 숙련도는 올라간다. 게임이 익숙해지는 과정.. 이것을 적응이라고 한다.


게임에는 튜토리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연습을 해 보고 룰을 익히는 과정이다. 모두 유저를 배려하는 게임사의 친절한 설정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저가 적응 못하면 게임은 계속될 수 없고 돈이 벌리지 않는다. 그래서 유저를 붙잡아 두기 위한 술책이 바로 튜토리얼의 존재 이유다.


쉬엄쉬엄 해! 오자마자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차가운 오피스 게임에도 튜토리얼은 존재한다. 회사가 착하고 친절해서 튜토리얼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피스 게임에 입성한 뉴비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즉, 뉴비가 노비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회사는 수습기간이라고 한다. 수습기간은 법에도 나와 있다. 이 말인즉 나랏님도 이 게임의 튜토리얼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기본적으로 수습기간을 튜토리얼이라고 보면 된다.


보통 수습기간은 3개월로 둔다. 수습기간에는 월급을 덜 줘도 되고 해고도 가능하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말그대로 개꿀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입경력 할 것 없이 수습기간을 떡하니 붙이고 들어간다.


해고? 이런 말이 겁나서 더욱 잘 보이려 애쓰는 사람들도 있다. 딱히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악성 유저 아닌 이상, 이 게임 한번 제대로 해 보겠다고 이제 막 들어온 뉴비를 회사는 굳이 돌려보내지 않는다. 아직 돈도 못 벌어왔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기 때문이다.


이미 오피스 게임을 해 보고 이직한 경력사원은, 수습기간 3개월 동안 새회사 적응을 끝내야 한다. 이들에게는 수습기간이 곧 튜토리얼 유효기간이다. 충분히 게임 적응을 마친 경력직이라면 이 시기 뭔가 보여주려고 요술을 부리기도 한다. 때로는 갈고닦은 필살기를 시전하기도 한다.


신입사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액면에는 경력사원과 똑같이 수습기간 3개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피스 게임 자체가 처음이다. 당연히 경력직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암묵적으로 튜토리얼 유효기간은 1년이 된다. 신입 전용 +9개월 튜토리얼 연장 쿠폰이 추가 지급되는 셈이다.


튜토리얼 시기에는 익숙함이라는 것이 없다. 당연히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다. 이 시기 실수나 잘못을 사람들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먼저 와서 할만하냐며 말도 붙여주고 친근하게 대해준다. 어려움에 혼자 끙끙거리면 여러 도움을 주기도 한다.


낯선업무, 잦은실수, 나만몰라, 깊은한숨, 지각한번, 나의사정, 서툴지만, 이런모습, 제발한번, 봐주세요.. 모든 것이 이해받고 용서 받는다. 그렇다. 튜토리얼에서는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원래 나쁜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은 것인가?  이 때는 친구들을 만나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당당히 얘기하고 다닌다. "여기 회사 분들 다 너무 좋아!"


주로 이 시기 회사 사람들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아..아니다.. 정확히 딱 이 시기에만 사람들 좋다는 얘기를 한다.


힘들면 언제든지 눈치보지 말고 얘기해!


오피스 게임의 튜토리얼은 철저히 할만한 게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게임의 재미는 어디까지나 초반 뿐이다. 게임에 중독되는 이유는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시간과 노력, 비용을 너무 많이 들였기 때문에 아까워서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오피스 게임도 이 기간 그리 높지 않은 난이도, 어렵지 않은 일, 거기에 가성비 있는 월급 보상을 맛본다. 이후 점차 들인 시간과 노력, 소모한 에너지가 아까워 이 게임을 계속하게 된다.


보통 수습기간에 회사가 사람을 내보내기 보다는 제발로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오자마자 나가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회사가 막장 드라마를 찍던가 아니면 내 선견지명이 탁월해서이다. 중독되기 전에 일찌감치 접고 다른 게임을 하러 떠나는 것이다.


수습기간이란 서서히 게임에 중독시켜 가는 시간인 셈이다. 해 본 사람(경력)은 중독이 빠르다. 안해 본 사람(신입)은 중독이 느리다. 그래서 신입과 경력의 튜토리얼 기간은 달라지게 된다.


괜찮아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뭐 어때?


수습기간 외에도 게임 곳곳에는 중독 효과를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있다. 보험사는 고객을 만나 첫계약을 하고 돌아오면, 통과의례처럼 모두 박수를 쳐 주고 상장도 준다. 자동차는 고객과 첫계약을 하고 돌아오면, 모두 꽃다발을 안겨주고 그 날 영업소 회식을 한다. 오피스 게임은 튜토리얼 맵에 소소한 이벤트 보상을 발생시켜 게임 중독을 촉진시킨다.


수습기간이 주는 착각은 크게 세 가지다.

사람들이 천사라는 망상!

일이 할 만하다는 공상!

다닐만한 회사라는 허상!

사람들이 배려하고, 실수해도 용서받고, 몰라도 이해받는 일상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라고 했던가?  미안하지만 이 세 가지는 오직 튜토리얼에서만 존재한다.


수습기간이 끝나면 이때부터 갑자기 일거리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며 혼미해지기 시작한다.

"아직까지 이런 것도 몰라?"

"이거 안 배웠어? 지금까지 뭐했어?"

이런 얘기를 가장 많이 듣게 된다. 알지도 못하는 이 회의 저 회의에 마구 불려다닌다. 사람들의 친절도가 확 떨어지고 상사들은 화를 낸다.


"오늘 중으로 다시 해 와!"

"이게 벌써 몇 번 째야!"

사람들은 더이상 배려해주지도 이해해주지도 않는다. 실수하면 바로 직격탄이 날라온다. "자료 이렇게 주시면 어떡해요! 빨리 양식 맞춰서 다시 보내주세요."


모르는 것들을 평소처럼 물어본다. 상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뒤통수로 답해준다.

"…최종 폴더에서 한번 찾아보세요." "아.. 네에.. " 바로 소심해진다. 왜 다들 돌변한 걸까? 꽤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가끔 멘탈이 흔들린다.


장난하는 거야 모야! 보고서 이 따위로 밖에 못 써?


사람들이 변했다고? 아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수습기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지..


튜토리얼에서 실체는 바로 유효기간이다. 수습이 해제되면 이해와 용서, 배려도 해제된다. 햇살의 따스함은 얼어붙어 차가움이 된다. 신호등의 파란불은 빨간불로 바뀐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려, 이해, 용서 이런 건 애당초 수습기간에 없었다. 원래 있었다고 믿있던 나만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 튜토리얼은 그냥 시간 한정 실드다.


오피스 게임 튜토리얼 모드에서는 플레이어 킬이 불가능하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게 되어 있다. 절대 사람들이 변한게 아니다. 단지 룰에 따른 것 뿐이다. 그들은 튜토리얼 유저의 레벨이 낮아 공격할 수 없기에 안한 것 뿐이다. 그들도 게임의 유저다. 누군가는 당신을 공격하는 것이 미션일 수도 있다. 이벤트 미션일 수도 있고, 고정 미션일 수도 있다. 그리고 끔찍하게 매일 해야하는 데일리 미션일 수도 있다.


튜토리얼의 유효기간 종료란 본 게임의 시작이다.

오피스 맵을 돌며 똑같이 사냥해야 하는 한 명의 유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수습기간이 끝나면 모든 것을 수습해야 한다. 이미 지나간 모든 것까지도..

이것이 오피스 게임의 튜토리얼이다.


이전 07화 "저 퇴사합니다!" 더 좋은 회사 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