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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맹 May 30. 2024

과연 회사에 살생부는 존재할까?

인사가 만사인 이유가 밝혀진다.


"다음은 바로 네 차례다!"


회사에는 살생부가 있을까? 대부분 오피서들은 잘 모른다. 있네 없네 뇌피셜만 가득하다. HR은 모든 일이 비밀이다. 그 중 살생부는 가장 극비다. 공식 업무에도 살생부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생부는 있다. 직원 면담이나 관찰, 평판 관리 같은 업무로 위장되어 있다. 모든 회사에는 일잘러보다는 꾸러기가 더 많다. 꾸러기 처리도 HR의 몫이다. HR 업무 중 난이도가 가장 극악인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꾸러기가 딱히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이상 내보내기는 쉽지 않다.


이 살생부란 HR이 바라보는 꾸러기 리스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살생부는 새나가는 순간 바로 큰 문제가 된다. 그래서 HR에서도 선임자나 관리자만 공유한다. 이런 건 HR 강사들도 알려주지 않는다. 대놓고 말 못하니까.. 말하면 일감 끊기니까..


고충 상담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목적이다.


일반적으로 살생부에는 이런 사람들이 올라간다.

1. 징계 이력자

2. 휴직 이력자

3. 인사 고과 부진자

4. 부서 분란 제조기

5. 50세 이상 고연령자

6. 여론 주도 스피커

7. 평판이 매우 안 좋은 자

8. 직급 대비 고연봉자

9. 회사 정책에 반기드는 반골 노비

10. 낙하산 깉은 요주 인물


살생부는 딱히 기록하는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통 X 파일에 정리해 둔다. 이름과 특징, 의견들을 대충 두서없이 정리해 놓는다.

대상자 : 초맹 (5년 차)
문제점 : 상사 지시를 따르는 법이 없다고 함. 신입들은 엄청 잡아대는 젊꼰. 커피 셔틀 아이콘이라 함. 일처리 별로고 퍼포먼스 안 나옴. 칼퇴는 기가 막힘. 빽이나 라인 없음.
관리방안 : 부서 저평가자로 분류시키고, 이후 단순 업무 위주 부서로 이동.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살생부에 등록되는 사람들은 약 10% 정도라고 보면 된다. 살생부를 만드는 이유는 뻔하다. 내보내기 위해서다. 적당한 시기를 봐서 내보내기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HR의 마지막 초필살기를 위한 준비 단계가 바로 살생부다. 살생부의 정보들은 다양한 경로로 모인다. 직원들의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고충 상담을 하기도 한다. 팀장이나 리더들을 만나 얘기를 듣는다.


직원들에게는 팀장이 어떤지 물어본다. 팀장에게는 부서 직원에 대해 물어본다. 처음에 "일은 할 만하세요? 어려운 점 있으세요?"로 시작해도 결국은 은근슬쩍 사람에 대해 물어본다. 애초에 그게 목적이다.


업무 내용이나 이런 건 별 관심없다. 들어도 잘 모른다. 이들은 사람 얘기를 무척 신경써서 듣는다. 특히 그 와중에 누군가의 흠이 들리면 철저히 메모해 둔다. 누가 성격이 개차반인지, 누가 지각대장인지, 누가 빌런인지 등등.. 누가 잘 한다는 건 기록 안 한다.


직급 간담회. 유사 집단을 모아 갈라치기를 할 정보를 모은다.


이렇게 들리는 직원들의 얘기는 한계가 있다. 대놓고 프락치 사업을 하기도 한다. 곳곳에 스피커들을 배치해 놓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인사 퀘스트의 기본! 뭣도 모르는 신입사원들을 케어 명목으로 불러모은다. "자아! 쭈욱 아뢰어 보거라!"를 시전한다.


아직 부족하다. 신입은 모르는 게 많아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직급별 고충 해결을 위한 간담회도 진행한다. 여기서 듣는 얘기들도 메모해 둔다. 이 때 스피커로 쓸 만한 싹이 보이는 자들은 포섭하여 친밀도를 유지한다. 스피커들은 인사팀이 자신에게 잘해주니 뭐라도 된 것 같다. 혜택이 생길 것도 같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HR에 많은 정보를 내어준다. 그러나 스피커들도 물갈이를 한다. 계속두면 저들이 재미들리기 때문이다. 이용가치가 떨어지거나 적당한 때 그 스피커들은 살생부에 올라간다. 그리고 조용히 어디 지방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꾸준히 작성되고 있는 살생부들은 언제 사용하느냐? 권고사직, 명예퇴직, 정리해고 같이 인건비를 대폭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올 때 요긴하게 사용된다. 그나마 회사가 돈 좀 있어서 이번에 물갈이 한번 하자며 신청 받는 명퇴는 좀 할 만하다.


오늘 둘 중 한 명은 짤립니다! 가위바위보 하세요!


문제는 명퇴신청이 다 안 차거나, 뒤에서 몰래 밀어내기를 시도해야 할 때이다. 일단 작전을 짜고 대상자를 불시에 부른다. 대비를 못하게 해 멘탈을 날리고 시작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보통 팀장과 담당 임원은 며칠 전에 알고 있다. 그리고 모른척 한다.


인사팀은 대상자들을 내보내기 위해 온갖 회유를 한다. 그러나 회유만으로는 약하다. 밥그릇을 뺏기고 쫒겨나게 된 자들은 방어력 500%의 버프가 붙기 때문이다. 이때 그 동안의 메모를 협박 카드로 사용한다. '제보가 왔다.', '너 보니까 이러하든데 니가 불리하다.' 상대가 주춤하는 순간 틈을 놓치지 않는다. 곧바로 약간의 위로금을 걸고 단칼에 목을 친다. 다 회사를 위해서라며..


방어력이 너무 막강하여 버티기를 시전한다면, 이들이 쓰는 매직 카드는 발령권이다. 공장이나 콜센터로 발령을 내버린다. 영업 직원을 연구개발팀에 보낸다. 대기발령이라는 투명인간 자아파괴 패시브를 걸기도 한다.


계속되는 HR의 압박. 결국 버티다 사인하게 된다.


자매품으로는 한참 후배가 팀장인 팀으로 넣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서로 껄끄러워진다. 팀장은 일 시키기가 불편하다. 선배는 말붙이기가 껄끄럽다. 결국 팀에서 같이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럼 HR은 이걸 빌미삼아 다시 내보내기에 돌입한다. 다들 부서에서 같이 일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 나가주셔야겠다. 이렇게 압박에 들어간다. 위로금 3개월치 월급 정도 걸고 저울질한다. 이유는 하나다. 내보내야 하니까.. 철저히 멘탈을 부셔버려서라도 내보내는 것이다.


물론 살생부에 올라갔다고 다 정리당하는 것은 아니다. 정리자는 리스트 중 2/3 정도라고 보면 된다.


만약 HR에서 부르면 무조건 녹음 켜고 가자. 음모는 갑자기 실행된다. 어떤 얘기를 듣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얘네는 흔들리는 눈빛, 버벅이는 말투를 보고 멘탈 지수를 판단한다. 정신 잘 부여잡자. 또박또박 이유와 필요한 거 다시 묻고 이렇게 말해라.


"지금 사안의 타당성과 적합성의 신중한 검토가 우선입니다. 여기서 즉답을 드리고 사인을 하기는 적정하지 않습니다. 제 로이어와 레이버 어토니랑 상의한 후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재직증명서나 급여 이런저런 서류 요구하고, 사실 확인을 두 세번 더 해라. 이 정도 하면 HR이 역으로 흔들린다. 자칫 일이 커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속 빠른 답을 보챌 것이다. 넌 방법이 없다며. 시간이 없다며. 아니다. 거짓말이다. 보통 갑자기 후려치는 밀어내기 시도는 절차나 직원 불이익, 사측의 구제 노력 등 어딘가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저거 뒤통수에 냉기도는거 보니 또 누구 하나 날렸구만.


HR. 처음의 시작은 학교에서 배운대로 적시적소에 알맞은 인재를 배치하고자 애쓴다. 직원들의 역량을 향상시키고 신바람 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한 꿈을 가진 이들. 봐야 할 이력서는 많고 고되다. 하도 많이 보니 무뎌진다. 매번 사람에 치인다. 이제는 이력서에 활짝 웃는 사진 속 사람은 보이지도 않게 된다.


사람을 다루는 인사에서 점점 사람이 사라져 간다. 사람을 바라보던 시선은 돈을 따라가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HR 최고 난이도는 바로 내보내기다. 내보내기를 잘 하는 HR은 어디서나 대접받는다.


태어난 순간 주민번호를 받는다. 주권이 생겼다고 착각한다. 주민번호는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입사한 순간 사원번호를 받는다. 가족이 되었다고 착각한다. 인사카드는 회사가 직원을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HR은 직원들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다. 직원들로부터 회사를 지키는 특급 수문장이다. 그들의 따뜻한 미소 뒤로 보이는 그들의 뒤통수는 차갑다.


그래 잘 봤다. 나랑은 상관없어. 난 아니겠지?

다음은 네 차례다! 이미 살생부는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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