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와 적임자
이 일의 전문가시잖아요!
"대체 누가 전문가고 누가 적임자야?"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누가 잘하는 사람인지 찾는다. 그리고 전문가라고 한다.
전문가. 이게 무슨 말인지 먼저 생각해 보자. 엑스퍼트, 스페셜리스트, 마스터, 장인.. 이런 얘기다. 아직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럼 저걸 더 풀어보자. 이 분야를 오래 한 사람? 깊이 있게 잘 아는 사람? 아님 전공, 자격증.. 이런 거 있는 사람? 이게 전문가일까?
좀 더 인수분해를 해 보자. 그럼 얼마나 오래 해야 되는 거고, 어느 정도 깊이가 있어야 되는 건데? 꼬리에 꼬리를 계속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온다.
이 전문가라는 말은 아주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실체가 없는 말이다. 아닌 거 같으면 내일 회사 가서 이렇게 말해봐라. "저는 엑셀 전문가입니다! 국가가 공인한 컴퓨터활용능력자거든요!" 그리고 주변 반응을 한번 보면 된다. 진짜 하려구? 바로 병맛테크 탈 거다.
전문가.. 실체와 기준이 없는 단어다 보니, 그냥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그런 단어란 말이다.
"굉장히 실력 있고, 해박하고, 잘하고, 또 많이 알면서...에...또...대충 이런 믿을맨이다... 따지지 마!"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기에는 넘 길고 없어 보인다. 대충 뭐 이런 거다 느낌 알지? 하고 만든 단어! 바로 ‘전. 문. 가.‘ 되겠다!
관상은 과학이고 언어는 자연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쫌 있어 보이는? 아하!' 이런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원주율 같은 거다. 3.14159265358979323846.. 아 없어 보이네.. 그냥 3.14 해버릴까? 하다가, "음.. π 파이 그래 이거로 퉁치자! π 이거 알지? 몬 느낌인지?" 뭐 이런 거니까 깊게 고민 말자.
회사에 전문가라는 표현은 자소서 쓰고 면접 볼 때부터 이미 많이 나온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거 국룰이잖아. 맞지?
이 전문가라는 표현을 회사 업무에 사용할 때는 흔히 일을 떠미는 경우다. 잘 몰라서 도움은 받고 싶다. 누가 해 줬으면 좋겠다. 이 일 좀 아는 호구 없을까? 떠올리다 그 사냥감이 포착되었을 때! 근데 이게 누가 할 일인지 애매하다 내지는 구실이 없다! 이럴 때 전문가를 만들어 버린다.
"이 분야 전문가시니까 이 일에 가장 적합해 보여서요!" "전문가니까 제일 잘 아시잖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그냥 지금 궁하니까 도와달라고 할 것이지. 전문가니까 어쩌고 꼭 이렇게 말한다.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왜 지가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여튼 뭐 결국 무슨 소리냐? 그냥 이 일 니가 해 달라는 소리다. 꿀 빨면서 자동사냥 좀 돌리고 싶을 때 쓰는, 인정과 칭찬을 가장한 가스라이팅 스킬 되겠다.
고로 상대방에게 이 말을 들었다는 것은 호구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필시 나한테 똥을 치우려는 개수작이렷다!' 눈치채고 재빨리 반격기나 호신술을 써야 한다. "네? 저 잘 모르는데요.. 무슨 얘기하신 건지도 잘 이해 안 돼요."
전문가니까 해야 된다? 이렇게 갖다 붙이면, 뭐 할 줄 아는 사람만 맨날 죽어나야 되는 건가? 월급 떼서 얹어줄 거냐? 돈 더 주냐? 오히려 모르니까 지가 해 봐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럴 때만 전문가? 그치? 애초에 말 같지도 않은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것이다.
전문가 공격은 어떤 캐릭터에게 딜이 쭉쭉 잘 먹히냐?
1. 장인 : 우물파기 스킬 셋을 갖춘 기술형 캐릭터다. 자기 영역 일에 조예가 깊고, 잘한다는 프라이드가 강하다. 주로 기술 분야나 현장에 많다. 아우라가 남 달라 알아보기도 쉽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그만하라고 해도 자기 성에 찰 때까지, 일을 계속 파고 또 파며 한 지하 18층까지 파고든다. 진짜 파다 보면 이따금 석유도 나오고 산유국도 된다. 정말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은 부류다. 그래서 전문가로 엄지 척해주면, 하기 싫어도 존심이 있어서 결국 한다.
2. 오지랖쟁이 : 이 부류는 말 그대로 특유의 생기발랄함과 오지랖으로 활동 반경이 넓고 얕게 많이 안다. 남 일에 잘 참견하고 아는 척하는 조언충이 많다. 그래서일까? 지랑 별 상관없는데도.. '도와주겠다.',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냐?' 이런 식이다. 여기서 "이 일 어떻게 해야 돼요? 전문가시니까 이거 좀 봐주세요." 이렇게 낚으면, 이들은 의도치 않게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회사에서는 가끔 회피하고 싶은 일을 떠안아야 할 때가 있다. 주로 필드에서 보스를 만났을 때, 보스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 상의하는 상황. 근데 하기 싫거나 잘 모르는 거다. 거부하지는 못하겠다. 발 빼기는 어려워 보인다. 요리조리 재봐도 각이 안 나온다. 전부 찐따들 밖에 없어 전문가 프레임도 씌우기 어렵다. 내가 이 일을 떠안을 각이다 싶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걱정 마라! 자매품 적임자가 있다. 상대가 나보다 고렙일 때 쓸 수 있는 공격 회피용 액티브 스킬이다. 단, 과장 이상 정도는 되어야 시전이 가능하다. 그냥 나 하기 싫다. 잘 모른다. 이러기에는 모양새 빠지는 데다 잘못하면 탈탈 털린다.
"들어보니 이 일이 되는대로 처리하기보다는 몇 가지 핵심 포인트가 있는 것 같은데, 관련된 적임자를 찾아 함께 체크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하는 거다.
얘기를 듣다가 즉석에서 떠넘길 상대가 바로 생각나는 경우 "이 방면에 경험 있는 김주임이 적임자이니 같이 좀 살펴보고 처리할께요." 이렇게 낚는다. 이제 김주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늪에 빠진다. 그냥 의문의 1패를 당한다.
이 스킬이 먹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스는 주어진 사안이 해결되거나 일이 처리되는 게 중요하다. 누가 하고 이런 건 관심 밖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적임자 스킬은 회피만 하다가는 극딜이 들어오게 되니, 그걸 이용해 나는 회피하면서 보스가 원하는 건 얻게 해 준다는 컨셉이다.
이어서 바로 떠넘길 수 있는 저렙들을 물색한다. 누가 지금 일이 별로 없는지. 누가 빠릿빠릿하게 할 수 있는지. 누가 제일 만만한지. 레이더를 풀가동해서 스캔한다. 그리고 표적에 걸린 저렙 호구에게 그 일을 떠넘기는 것이다. 그래서 레벨이 어느 정도 되어야 쓸 수 있다.
호구 대상에게 간다. 그 일을 해야 되는 이유, 너가 해야 되는 이유,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 너밖에 없다는 이유, 너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 뭐 이런 걸 엄청 열심히 아무 말 대잔치로 설명한다. "그래서 니가 적임자!" 서둘러 결론짓고 일을 떠 넘긴다.
가끔은 뭐 급하면 그런 거 없다. 새우깡 마냥 손이 가는 대로 떠넘길 애를 고르기도 한다. 당하는 호구는 저렙 중에서도 속성이 초식류면 "네 네." 하다가 뜬금포로 당한다. 고개는 갸우뚱.. '이거 왜 내가 해야 되지?' '뭐 어케 하라는 거지?' '나도 잘 모르는데.." 이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어버버..' 하다가 이미 '텁..' 하고 받아버린다. 이거 무슨 느낌인지 알지?
심지어 '적임자는 너여야 하는 이유'가 잘 안 먹힌다 싶으면, 그냥 대놓고 '보스가 너랑 하래더라..'까지 나온다. 그럼 뭐 이제 빼박을 못하는 거다. 보스한테 가서 "정말 저랑 하라고 말씀하셨나요? 이제는 진실을 말해주세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이러고 확인할 것도 아니잖아? 가서 확인한다고 한들, '응 니가 적임자래!' 이 한마디에 아무 말 못 할게 뻔하다.
어쨌든 일을 떠 넘기고 그다음 신경 끄면 다행인데, 스킬 시전자는 꼭 와서 '어떻게 되어가냐?' '언제 끝나냐?' '다 되면 알려줘라.' 이러고 수시로 연속기를 날려댄다. 그걸 모두 극복하고 다 해다 주면, 차린 밥상 떡하니 받아서 그 위에 숟가락을 살포시 얹어 보스에게 신나서 보고한다.
여기서 자기가 한 거로 싸악 둔갑시켜 버리는.. 이 대목이 바로 매직 하이라이트!! 이걸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한다. 누워서 떡 먹는다 한다. 꿀 빨며 자동사냥 돌린다고 한다. 4자 성어도 있다. 타산지석!
일 중에서도 특히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바로 적임자로 떠 밀려서 급하게 하는 일이다. 그거 한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떠민 자는 지가 했다고 둔갑시킨다. 위에서는 실제 누가 했는지 알 바 아니다. 그런 일은 잘해도 꼬이고 못해도 꼬인다. 왜냐구?
초맹의 적임자 찍힘 공식
시나리오 1. 그 일을 잘했다? 떠밀기 좋음
앞으로도 계속 적임자로 찍힌다.
시나리오 2. 그 일을 잘 못했다? 맘에 안 듬
일 못하는 바보 테크로 찍힌다.
즉, 잘 하든 못 하든 얻는 게 없다. 차라리 봉사활동 같은 건 뿌듯한 보람이라도 얻어간다. 이건 뭐..
고로 누가 적임자 스킬을 내게 사용한다 싶을 때는 당황하지 말고, '해주고는 싶은데 다른 누군가가 같이 있어야 한다.'거나, '더 긴급한 걸 하고 있다.' 같은 회피 스킬로 모면하자. 정 안 되겠으면.. 어디 급하게 회의라도 가는 척하며 워프를 사용하는 게 더 유용하다.
적임자로 이 일 저 일 다해서 나 없음 회사 안 돌아갈 거 같은가? 전문가 소리 하도 많이 들어서 자부심이 하늘을 뚫을 기세인가? 회사에서 전문가와 적임자?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다. 그 얘기 들으면 오피서들 막 헤벌레 하던데 좋은 얘기 아니다. 칭찬도 아니다. 속지 말자.
누군가 내게 와서 전문가라고 말하면, 그것은 날 호구로 찍었다는 소리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서 전문가라고 말하면, 난 호구를 찾고 있다는 소리다. 누군가 지 혼자 스스로 전문가라고 말하면, 걔는 사기꾼이란 소리다.
전문가를 못할 때 적임자를 쓰는 거다. '지금 이거 떠넘길 캐릭터'를 어떻게 '적임자'로 포장하고 둔갑시키냐만 있을 뿐..
어디 가서 전문가 되고 싶다는 소리는 쉬잇!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적어도 전문가와 적임자는 절대로 되지 말자!
P.S. 전문가와 적임자 - 초맹 -
내가 그를 적임자라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전문가라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를 전문가로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적임자가 되어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꿀 좀 빨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많이들 되어다오. 나는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