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저희 회식 언제 해요?
가장 조심해야 하는 자리 회식!
긴장의 연속 오피스 게임. 언제나 팍팍하다. 그제도 팍팍했다. 어제도 팍팍했다. 오늘도 팍팍하다. 내일도 팍팍할 것이다. 뭐 실은 맨날 그렇다.
이 팍팍한 긴장이 사라지는 마법의 순간이 있다. 사람 냄새나는 순간. 싫던 사람도 다시 보게 되는 순간. 그래도 오피스 게임이 할만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회식이다.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오피서들의 고유 특권과도 같은 것이다. 그 어느 회사도 회식을 못하게 하지 않는다. 돈에 눈멀어도 회식비는 줄이지 않는다.
내 돈 내고 못 먹는 걸 먹는 날. 뭔 짓거리를 해도 용서받는 날. 조금은 흐트러지는 여유를 보여도 되는 날. 평소 못하던 얘기를 할 수 있는 날. 바로 회식날이다. 그렇다. 사람들의 마음이 넓어진다. 평소에는 야근 못 시켜 안달이더니 회식 날은 야근도 못하게 한다. 다들 시계만 보다 적당히 한 시간 정도 앞당겨서 팀장부터 일찍 나간다. 이 날은 모든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심지어 다음 날 지각도 허용되곤 한다.
회식장소에 가면 두 세명은 회의하듯 잽싸게 메뉴판을 펼쳐 주문을 넣는다. 한 명은 수저 세팅을 한다. 이때 다른 한 명은 물부터 쭉쭉 따라 돌린다. 노는 사람이 없다. 이야.. 평소 안 되던 협업이 이렇게나 잘 된다. 고기는 어린이들이 굽지 않는다. 팀장이나 선임들이 굽는다. 대단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두 고생들이 많습니다! 한 잔씩들 합시다!"
첫 잔은 항상 잔을 채우고 건배사가 나온다. 꼰대들이 많은 곳은 여전히 건배사가 구리다. 목소리가 커야 된다. 회식장소 전세라도 낸 듯 외친다. 그렇다. 주변 사람들 다 들으라는 거다. 이름 있는 네임드 회사라면 회사 이름을 꼭 낑겨 넣는다.
"우리는 초맹인! 우리가 남이가! 위하여! 위하여! 위! 하! 여!"
반면 꼰대들이 드문 곳은 건배사가 파워풀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하다. 근데 뭔가 느끼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짠!"
뒤에다가 "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여기까지 안 붙이는 게 천만다행이다.
치익~ 치익~ 소고기 굽는 소리. 고소한 향기. 구워지면 앞접시에 집게로 하나씩 놔주는 선임들.
"박 과장! 먹으면서 해. 굽기만 하느라 못 먹잖아! 이거 먹어!"
팀장은 쌈도 싸서 넣어준다. 모야 이거? 천사들의 쌈 싸 먹기야?
입안에 돋는 쫄깃함. 육즙은 팡팡 터진다. 한잔 쭈욱. 아으.. 달달하다. 술이 달면 무조건 2차 각인데. 서서히 대화의 꽃이 피어오른다. 개인적인 경험담부터 저번에 깨졌던 일에 대한 오해. 힘든 얘기. 속상한 얘기. 섭섭했던 마음들이 모두 불판 위로 올라오며 맛있게 익어간다.
"팀장님! 저번에 막 저 혼내신 거 그거 제가 그랬던 게 아니라, 옆팀 정대리가 그런 거라고요!"
"아 아? 그랬나? 이거 미안하게 됐네. 내가 내일 정대리 혼쭐을 내줄께! 자 한잔 받고 털어버리자구!"
"과장님. 요새 잘해보려고 하는데 힘들어요. 자꾸 스케줄은 지연되고, 바쁘신 것 같아 물어보기도 뭐 하고 그래서.."
"아니야. 충분히 잘하고 있어. 모르는 건 편하게 물어봐도 돼. 내가 좀 먼저 챙겼어야 하는데.."
아. 좋다. 여기도 사람 사는데구나. 회사는 다닐만한 거였구나. 알고 보니 다 좋은 사람들이었어. (그 생각이 든다면 아직 덜 안 거다.)
술이 돈다. 잔이 돈다. 모자라면 더 시켜! 추가 오더 팍팍 들어간다. 사장님은 서비스도 준다.
"근데 장 과장은 왜 맨날 회식되면 안 오는 거야?"
"투잡 아닐까요? 집에서 가게 차렸다는 거 같은데?"
"그래도 회식인데 같이 있어야죠! 너무 따로 논다."
이제 슬슬 시작이다. 1시간 뒤부터의 대화는 그야말로 막장이 되기 시작한다. 별 음모론부터 갖은 뒷담질에 선을 아주 찍찍 그으면서 넘어댄다. 지는 술 쎄다고 주량 자랑하는 애도 하나씩은 꼭 있다. 점점 브레이브 해져 가는 자들도 나온다.
"다 나오라 그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거 알어? 옆팀 주대리 불륜이래! 미쳤다 아주."
"마케팅 박 과장 술만 마시면 바지에 오줌 싼대. 길에서 잔 적도 있대드라. 혹시 들었어?"
"어이 초맹! 넌 왜 안 마셔?"
"저는 주님의 어린양이라..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착하게 살다 천당 가게요."
"뭔 옘병 쌈 싸 먹는 소리야! 주님 여깄잖아. 여기 이슬이! 푸헤헤"
"아 네.. 뭐 콜라도 취하네요. 헤헤.."
대화는 점점 수위조절에 실패한다. 자리가 여기저기 섞인다. 그릇과 수저가 마구 바뀐다. 드럽다. 내 수저를 사수해야 한다. 신입은 벌써 옆에서 뭐가 힘든지 울고불고 통곡질이다. 저 끝에 두 사람은 뭔가 지들끼리만 심각하다.
팀장은 흥에 겨워 자리를 돌며 각설이 품팔이 하고 다닌다. 호칭은 막 형 언니 누나로 바뀌어 있다. 뭐 대화 들어보면 가관이다. 앞으로 형이 앞길 다 책임진댄다. 믿고 지만 따라오랜다. 풉..
1차 끝나고 나오면 걸음걸이들이 8자가 된다. 고개는 자진모리 장단에 맞춰 흔들거린다.
"2차! 2차! 야! 야! 어디가! 2차 가야지!"
"넵! 부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한동안 코로나로 봉인당했던 회식이 해제되는 순간, 이들의 봉인된 자제력도 해제되었다. 언제나 회식의 화룡점정은 노래방이다. 요즘 회식 코스에서 노래방이 점점 묻혀져 가고 있어서일까. 어쩌다 회식 코스에 노래방이라도 한번 끼는 날에는 시간 연장은 기본. 서비스 시간 몇 분 들어가는지 체크하고 클레임을 넣는 이들도 있다.
이것들 앞에서 열심히 춤도 춘다. 그렇다. 음주가무라는 게 이런 거다. 그 와중에 흥겨운 사랑 트로트 찍어다가, ‘그대’ 부분을 상사로 가사 바꿔가며 아부 떨고 별짓 다 한다. 맨 정신으로 탬버린 후려치면서 구경하면 나름 재미있다. 손바닥이 좀 얼얼할 뿐이다.
점점 눈앞이 흐려져 간다. 하늘이 움직인다. 의식이 없어져 간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렇게 그들의 회식은 사람다운 저녁으로 시작해서 광란의 밤으로 끝이 난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과 마주친다. 눈을 반쯤 뜬 사람들. 눈알 시뻘건 사람들. 속이 쓰린 사람들. 다양하다. 사무실에는 술 냄새의 잔향이 남아있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헤헤."
"회식 몇 시에 끝났죠? 생각이 안 나네. 아 속 쓰려.."
쓰리겠지. 팀장이랑 러브샷을 그렇게 해댔으니..
옆에서는 한바탕 큰소리가 들린다.
"형! 오늘도 파이팅이에요!"
"뭐? 형? 형? 미쳤어? 정신 안 차려? 여기 회사야!"
그럼 그렇지. 우애 있는 척 호형호제하더니만, 매직타임은 딱 어젯밤뿐이었다.
휴게실에는 어제 주인공들의 무용담이 퍼지고 있다.
"어제 신입 질질 짜는 거 봤어? 걔 또라이 아냐?"
"이야.. 정대리 나한테 억화심정 글케 있는지 몰랐네. 어이가 없어서. 함 보자 아주!"
그렇다. 이것이 회식의 찐 실체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라고 한다. 맞다. 회식은 오피스 게임의 연장이다. 무슨 소리냐?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발가 벗겨져 무장해제 당한다는 얘기다.
정말 좋은 사람들인지 알고 같이 섞였다가 한 번에 나락 가는 수가 있다. 자리는 지키되 같이 섞이지 마라! 맨 정신으로 관찰하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다. 왜냐구? 다른 사람들 약점과 많은 정보들이 고스란히 들어오잖아. 그리고 내가 저들에게 약점 잡힌 게 있나? 없다. 이 얼마나 개이득인가?
회식 때 아무리 잘해준다고 믿고 풀어지는 거 아니다. 저거 다 컨셉이다. 자꾸 뒤탈 없다고 하는데, 뒤끝들이 아주 오진다. 오피스 게임에서의 회식은 그냥 연장 사냥 시간이다. 저들이 무장해제 되는 순간을 사냥하면 된다.
회식은 회사가 오피서들을 무장해제시켜 약점을 잡아내는 장이다. 그래서 회식은 안 없애는 것이고, 회식비는 삭감을 안 하는 것이다.
못 믿겠으면 부장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이라고 계속 외치며 하트 뿅뿅 쏴 봐라. 다음날 찐따라고 소문난다.
오피스 게임 회식의 법칙이다. 외워라. 밑줄 쫙. 별표 다섯 개다. 두 달에 한번 실기시험에 나온다. 회식은 1차 참석만 권장한다. 회식 날은 가급적 가방을 가져가지 마라. 그래야 빠져나오기 쉽다. 1차 끝나고 가는데 뒤에서 부를 때는 앞만 보고 가라.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 괜찮다. 기억 못 한다.
회식장소에서 자리 선점이 중요하다. 일단 가운데 가서는 안 된다. 입구 쪽 사이드가 정답이다. 고개 돌리지 않고 한눈에 관찰하기 좋다. 빠져나가기도 쉽다. 그걸 명당이라고 한다. 회식장소에 갔는데 사람들이 떠밀어서 센터로 몰리게 생겼다면? 이때는 저 화장실 좀.. 을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빠지면서 사이드를 차지하는 것이다.
술은 못 먹는다고 해라. 먹는 거 안다면 건강에 이상 있어 끊었다고 하거나 약 먹는다고 해라. 이 참에 주님의 어린양이 되었다고 해도 좋다. 자리 이동 그런 거 하지 마라. 말 많이 하지 마라. 맨 정신으로 한 명 한 명 뭐하는지 관찰하면서 즐기면 된다. 무장해제 당해 바보가 되어가는 모습들을..
회식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어 교묘히 오피서들의 약점을 잡는 도구일 뿐이다. 이것만 명심하면 된다.
그럼 술은 언제 먹냐구? 술은 쟤네랑 먹는 게 아니다. 자고로 술이란 집에서 편하게 혼자 먹는 것이다. 맘에 안 드는 것들 주술인형 만들어서 앞에 놓고, 요렇게 무섭게 쫙 째려보며 바늘로 팍팍 찔러가면서 말이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자.. 오피서들아. 하아.. 회식 갈 시간이다. 오늘 야근 그런 거 없어! 빨리 다 나와!! 모해? 나오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