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장 내시경의 비밀

비움과 채움

by 서나송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이미 알고 있는 그 맛,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질 일들까지. 시작하기 전부터 막막했다. 하지만 나의 대장 상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12시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약을 탄 물을 15분 간격으로 네 번에 걸쳐 1리터를 들이마셨다. 그 뒤에 추가로 물 500ml를 마셨다. 그렇게 시작된 장의 활발한 운동. 서 있는 것도 힘들고,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눈뜬 채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설명서에 적힌 대로 내 장은 어지간히 비워졌을 거라고 믿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프로포폴이라는 주사와 함께 잠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부디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장을 비우는 일이 이렇게 힘든 과정이었던가. 짧은 시간 안에 억지로 비우려 하니 그만큼 응축된 고통이 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의 비움은 3일 전부터 시작되었었다. 피해야 할 음식 목록을 보며, 내가 좋아하는 메뉴와 과일들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더 먹고 싶어졌다. 검진이 끝나면 먹겠노라고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미소를 짓는 나 자신이 유치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검진 당일이 되자, 적어놓은 음식들 중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 또한 피해야 할 자극적인 메뉴들이었던 것이 함정. 결국 죽으로 시작해 야채와 과일을 조금씩 먹었다. 그런데 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가득 차 있던 가스가 배출되지 않으니 음식과 뒤엉켜 통증을 만들어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좋은 것들로 몸을 채우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문득,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근의 나는 잘라내고 비우는 것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비움은 단지 과정일 뿐, 진짜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무엇으로 나를 채우느냐'가 너무 중요하다는 걸.


장을 비우는 동안, 나는 내가 어떤 것들을 욕망하고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들여다보게 된 시간이었다.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내 몸을 진정으로 살리고 회복시키는 것들로 나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쌓인 과거의 아픔, 불필요한 걱정, 무의미한 욕망을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 무엇을 새롭게 담을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비우는 일이 고통스럽고 버거운 과정일지라도, 그 끝에 찾아오는 가벼움과 회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비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비움은 채움을 준비하는 과정이니까. 비우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더 나은 것들로 나를 채워가는 일에 마음을 쓰고 싶다. 그런 채움이 내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드는 진짜 비움의 완성일 것이기에.




서나송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생애 가장 빛나는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