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라는 이름의 두려움
무대는 묘한 곳이다. 처음 그곳에 섰던 기억은 마치 희미한 연기처럼 아련하다. 쏟아지는 조명이 시야를 가리고, 떨리는 손으로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리던 순간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면 이 떨림도 익숙해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무대는 언제나 낯설고 조심스러운 공간이었다. 때로는 객석의 얼굴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이는 가까운 무대였고, 때로는 형체조차 분간할 수 없는 검은 심연 속에서 홀로 연주를 마쳐야 하는 고독한 무대였다. 관객의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도, 때로는 숨 막히는 침묵과 냉정한 시선 속에서도, 무대 위의 나는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오롯이 혼자였다.
그 고독함을 더욱 짙게 물들인 사건은 석사 졸업 리사이틀에서 벌어졌다.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던 중, 갑자기 악보가 새하얗게 지워졌다. 손가락이 엉뚱한 건반을 짚는 순간,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고, 손가락은 길을 잃은 듯 헤맸다. 불협화음. 그 단어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멈출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절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음으로 돌아가야 할지, 이 곡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객석의 숨소리조차 점점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겨우 연주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왔을 때, 두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고, 눈앞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날 이후, 무대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연습실에서는 자신 있게 연주하던 곡도 무대 위에서는 달랐다. 손에 땀이 차고, 심장은 두 배로 뛰었고, 조그마한 실수도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믿었지만, 무대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모든 노력은 무력해지는 듯 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무대라는 공간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동안 나는 무대 위에 서 있어도, 나는 그곳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고, 연주를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온갖 잡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실수하면 안 돼', '까먹으면 어쩌지',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과 초조함의 벽 안에서, 무대는 더 이상 음악을 위한 순수한 공간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배워나갔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무대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무대는 나를 심판하는 곳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는 자리였다는 것도. 존경하는 스승의 연주를 보면 실수조차도 연주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당당함이 있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모습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연습실에서는 철저하게 준비하되, 무대에서는 잘 하고 싶은 마음조차 내려놓는 것. 이 단순한 원칙을 깨닫기까지 사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흐 푸가를 망쳤던 리사이틀 이후, 나는 다시 무대에 섰다.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었지만, 전과는 달랐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그 순간의 음악에 온전히 집중했다. 내 감정과 에너지를 담아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비로소 충분히 노래할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무대뿐 아니라 삶에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삶의 매 순간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무대란 단순히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매 순간이 누군가를 위한 무대이거나, 혹은 나 자신을 마주하는 성찰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하고, 당황하며, 때로는 회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삶이라는 무대는 완벽한 모습만을 강요하는 자리가 아니라, 수많은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배우는 곳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무대들을 결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위에서 어떤 태도로 서 있을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그 순간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두려워도 한 발 내디디고, 실수 속에서도 길을 찾으며,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완벽을 쫓기보다 진심을 담아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무대가, 그리고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이 아닐까.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담아내는 것이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었다. 내려놓아서 그럴까? 이제는 두려움마저 익숙해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결코 진부하지 않다. 불안 속에서도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과정은 결국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매일 오르는 삶이라는 무대. 사랑하는 아이 앞에서, 소중한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심지어는 고독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무대 위에 선다. 그 모든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면, 무대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그 자리에서 내가 진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발견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내려놓음, 그리고 진심'. 이것이 내가 삶의 무대에서 배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건반 밖 엄마,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