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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되는 용기

by 서나송

주말, 남편이 감기에 걸렸다.

부랴부랴 점심을 차리며 아이에게 말했다.

“아빠 아프니까 우리 밥 먹고 나가자. 아빠 혼자 좀 쉬게.”

그 말에 아이가 툭 던진 말,

“근데… 엄마도 아프잖아.”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 나도 아팠다.

편도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을 만큼.

그런데, 나는 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덜 아팠던 걸까?

아니면, 모른 척 했던 걸까.


평소 남편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아이를 데리고 외출했었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의 배려였다.

“엄마는 나아가는 중이고, 아빠가 지금 감기니까 더 힘들 거야.”

진심이었다. 얼마나 쉬고 싶을 지 아니까, 고요한 집에서 온전한 쉼을 누리길 바랐다. 기꺼이.







의사가 물었다.

“몸살 안 나셨어요? 이 정도면 많이 아팠을 텐데요.”

그 정도로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아프다고 느끼지 않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은, 너무 많은 걸 멈추게 하니까.


주말, 낮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루 세 끼 모두 챙겨야 하는 날, 집안일도 아이들과의 시간도 평일보다 더 쪼개서 보내야 하는 건 모든 엄마들이 아는 사실이다.

십 분쯤 눈을 붙였을까.

아이들이 다 같이 자전거 타고 한강 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 말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나 페달을 굴리고 굴렸다. 왕복 25km.

무리였는지, 그날 밤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침을 삼키기도 힘든 새벽, 감기에 걸린 것이다.


잔병치레가 드문 나는, 오히려 아프면 미안해진다.

몸이 안 좋을 때조차 아픈 티를 내는 데 주저하는 건, 엄마라는 이름 때문일까. 엄마가 아프면 집안의 리듬이 뒤틀리니까. 아픈 내 몸보다, 아파서 생길 혼란이 먼저 떠오른다. 자연스레 내 컨디션보다 가족의 리듬을 먼저 보게 되지만,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은 없다. 나 스스로 ‘아프면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들었을 뿐.






사실은 나도 쉬고 싶었다. 비타민 듬뿍 투여하고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었다. 시끌벅적한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길게 늘어진 식당 줄에 몸을 세우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었지만, 남편은 쉴 수 있고 아이는 행복할테니까. 매사에 천사같은 나는 결코 아닌데, 천사인 척 한것 뿐이다.

모든 '척'이 진짜가 되는 순간.

안 아픈 척, 안 힘든 척.


왜 그토록 아프지 않으려 했을까.

‘아프면 나만 힘들지‘라는 말에는

날 위한 배려가 있지만,

‘엄마가 아프면 안 되니까.’란 말에는

가족을 위한 책임감만 존재한다.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밥을 차릴 수 없고,

안정적인 무언가가 흐트러질까 봐.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내 형편은 미뤄두게 된다.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금지령.

아프지 마, 힘들다고 말하지 마, 잠깐이라도 멈추지 마.

언젠가부터 나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는 법을 익혔던 것 같다.

긴장으로 빈틈을 막고, 스스로 면역력을 만드는 척했지만

사실은 좋은 바이러스마저 쫓아내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긴장감이 오히려 내 안의 면역력을 갉아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그 삶을 가장 먼저 허락하지 않았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겠다.

‘아파도 괜찮아.’

내가 나를 돌보는 일이, 결국 아이와 가족을 지키는 일이 되니까.

아니 그 전에 나를 지키는 일.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쉬고 싶을 땐 잠시 멈출 수 있는 여유.

엄마란, 아내란, 모든 걸 감내하는 힘이 아니라,

그 모든 걸 스스로에게 허락해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



서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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