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균형과 용기
요즘 내 딸은 코바늘에 푹 빠졌다. 아직은 왕초보라 실을 꿰고 푸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지만, 그 손끝의 진지함은 어른 못지않다. 같은 반 친구가 만든 가방을 보고 놀람과 함께 아이의 눈빛에 금세 반짝이는 욕심이 담겼다. 그날 이후, 유튜브 영상으로 코바늘 기초를 배우고, 동그란 코를 몇 개씩 만들어내며 스스로 뿌듯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엔 단순 호기심이었지만, 어느새 실과 바늘을 다루는 손끝이 꽤 야무지다.
실이 삶이라면, 바늘은 나일까,
아니면 나의 삶을 짜는 그분일까.
그 작은 뜨개의 세계는 놀랍게도 인생을 닮아 있었다.
촘촘하게 뜨고 싶어 바늘에 힘을 잔뜩 주면 다음 바늘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너무 느슨하면 바늘이 헛돌았다. 코가 빠지고, 실이 풀리고, 모양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삶도 그렇다. 너무 빡빡하게 조여진 삶엔 다른 무엇도 들어올 틈이 없다. 해야 할 일, 꼭 지켜야 할 목표, 하루를 단단히 채운 계획표. 계획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만, 때론 너무 조여서 숨이 막힌다.
나는 꽤 자주 그렇게 살아왔다.
빈틈없이 계획을 새웠고, 뭐라도 하고 있지 않는 시간은 불안했다. 잠깐의 쉼조차 낭비라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은 신기하게도 성취감보다 피로와 외로움만 남기곤 했다. 조이면 조일수록, 삶은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와 삶 자체의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랄까.
반대로, 힘을 빼고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날들은 어땠을까.
‘운명이라면 언젠간 되겠지.’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렇게 합리화하며 미뤘던 일들. 마음속에는 간절함이 있는데, 정작 손끝은 멈춘 채로 흘려보낸 시간들. 성실하지 않은 맡김은 맡김이 아니었다. 진짜 맡김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에 오는 여백이어야 했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뜨개질이 아이의 기대에 미칠 만큼잘 꿰어지지 못할 때도 많았다. 코바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애써 꿴 실을 푸르고 꿰고를 반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날은 너무 애써 꿴 실이 아까워서 풀지 못하고 그냥 계속 떠간 적도 있다.
“엄마…!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틀린거같아. 그양 계속하면 안될까?”
“아깝다고 그냥 하면, 다음 코도 이상해지고… 결국은 다시 풀게 될 수도 있어. 지금 풀고 다시 뜨면 처음 했을 때 보다 더 금방 떠지고 원하는 모양이 될지도 몰라~”
아이의 손끝이 망설이다 실을 당겨 맨 처음 매듭까지 풀어냈을 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이 들인 공을 스스로 풀어내야 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나에개 질문을 던졌다.
나 역시 내 안의 매듭을 풀지 못해 붙잡고 있던 건 없었을까?
이미 잘못된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쏟은 시간과 마음이 아까워, 그저 ‘계속 가자’며 나를 설득하던 순간들. 그 실마리를 놓지 못하고 계속 떠나가다 보면 삶은 점점 더 엉켜간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이미 시작한 뜨개를 다시 처음부터 푸는 용기.
정성껏 쌓은 것을 무너뜨리는 용기.
그 안에 더 나은 무늬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코바늘은 눈으로만 배우지 못한다. 직접 손끝으로 꿰어보고, 풀어보고, 다시 꿰어봐야 한다. 적당한 텐션이 무엇인지, 힘의 균형은 어떻게 잡는지 스스로의 감각으로 익혀야 한다.
삶도 그렇다. 누가 대신 떠줄 수 없다. 자신만의 손끝으로, 감각으로, 시행착오로 배워나가는 것.
적당한 긴장과 여유, 성실함과 내려놓음,
단단함과 유연함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
그게 바로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나는 오늘도 나의 바늘을 쥔다. 조금 느리더라도, 성실하게 떠 내려간다. 때론 풀고, 때론 다시 시작하며 정성으로 한 코 한 코 나의 무늬를 짜내려 간다. 삶을 짜는 손이 바늘과 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듯, 나와 내 삶이 창조주의 손 안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믿는다.
행여 잘못된 매듭 앞에 망설이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더 아름다운 무늬는 모두 풀어낸 다음에 찾아올 거라고.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