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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는 바다에 살아야 했다.

갯벌 체험이 가르쳐준 삶의 농도

by 서나송


조개를 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말랑한 흙이 발목까지 빠지는 그곳, 바닷물이 빠진 후의 갯벌은 ‘체험’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꽤나 투박하고, 솔직하며, 삶의 냄새가 났다.


우리는 장화를 신고 트랙터를 타고, 진짜 갯벌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가르치는 사람도, 정해진 룰도 없었다. 그냥 각자 호미 하나를 들고 자기 앞의 땅을 파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긁고 또 긁었다. 애초에 계획은 없었지만, 캐낸 조개를 바구니에 모으는 일에는 묘한 경쟁심이 붙었고, 나는 어느새 호미질에 온 힘을 실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해보는 조개 캐기는 계속 허탕이었다.

트랙터를 타고 다시 돌아갈 때 즈음 알게 되었을까?

이 일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무작정 긁기보다는, 뻘의 결을 따라 살짝살짝 긁다 보면 손끝에 닿는 미세한 감각이 느껴졌다.

조개는 거기에 있었다.

살짝 걸리는 느낌, 얇은 껍질이 뻘 속에 숨은 채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힘주어’ 해왔던가.

애쓰고, 조급해하고,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밀어붙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갯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힘을 빼야 걸린다고, 조심히 다가서야 만날 수 있다고,

이곳에서는 그게 진리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도 한참을 열심히 땅을 팠다.

처음엔 재미있다며 호기롭게 바구니를 들더니, 삼십 분쯤 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해녀는 진짜 힘들겠다.”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나는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체험의 무게를 느꼈다.

몸으로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해가 아니라 통과된 감각.

아이의 손끝에 전해진 갯벌의 힘이, 그 말을 통해 나에게도 전해졌다.


문득 ‘이걸 왜 돈 주고 하고 있을까?’란 맘이 스며들었다.

먹지도 못할 동죽 몇 마리 캐겠다고, 힘들게 장화를 신고, 트랙터를 타고, 뻘에 발이 빠지는 수고까지 하며.

일당을 받고 캐도 마땅한 일 아닌가!

하지만 그날 우리가 얻은 건 조개가 아니었다.

돈 주고 산 건 체험이었고, 그 체험을 통해 얻게 된 건 돈보다 귀한 감각이었다. 몸으로 느낀 시간, 말이 아닌 감각으로 배운 깨달음, 그 모든 것이 삶의 결을 조금 더 섬세하게 읽어내게 해 주었다.



집으로 가져온 동죽을 해감하기 위해 생수와 소금을 섞어 바닷물과 비슷한 농도를 맞추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해감이 쉽지 않은 조개 중 하나가 동죽이었지만, 나름 바다와 비슷한 농도로 맞추었다고 자신했고 동죽을 듬뿍 넣은 칼국수나 봉골레 파스타를 먹는 기분 좋은 상상도 했다.


하지만 야무진 꿈과 다르게 조개는 제대로 모래를 토해내지 못했고, 이틀이 채 안되었을 때 비린내를 내뿜으며 입을 벌린 채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온도였을까, 농도였을까, 좁은 공간이었을까. 이유를 찾으려 들어도 이미 죽은 조개는 말이 없었다. 살아있던 조개가 그리도 빠르게 죽는 걸 보며, 나는 다시금 바다를 떠난 생명에 대해 생각했다.


조개는 바다에 있어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


바다를 흉내 내는 건 가능했지만, 바다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정성껏 조개를 위해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도, 그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파도가 일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는 그 흐름 속에서 조개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 반복되는 생명의 리듬 속이야말로 조개가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자유롭지 않아도 살아있는 자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숨을 쉴 수 있는 환경.

그것이 바다가 가진 농도였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종종 내게 맞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고자 애쓴다.

적절한 온도와 습도, 계산된 안정감, 정제된 말과 예측 가능한 사람들.

그러나 그 모든 세팅이 완벽하더라도,

진짜 숨을 쉴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은 내게 맞는 환경이 아닐 거다.

내가 만들어낸 이 ‘바다 비슷한 것’이,

결국 바다가 아닌 것처럼.

제 자리를 떠나면,

살아는 있어도 진짜 숨은 쉴 수 없는 상태가 되듯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내면은 서서히 말라가는 그런 삶을 살지 모른다.


삶에는 저마다의 최적 농도가 있다.

어쩌면 그 농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흐름에 맡기고, 반복되는 어떤 파도에 몸을 실어야만,

비로소 살아있는 결을 따라 호흡하게 되는 것.

그 자리가 진짜 바다이고,

그 환경이 나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자리임을 잊지 말자.



서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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