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 가격표
며칠 전, 아이가 물었다.
“엄마, ○○○○ 유튜버 알아?”
“모르겠는데, 누구야?”
“그냥 브이로그 찍는 사람인데, 집이 3층이고 수영장도 있어! 엄청 부자야.”
“유튜브도 안 보면서 어떻게 알았니?”
“학교에서 친구들이 다 얘기해.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지인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SNS 속 그들은 늘 타인이 갖지 못한 것들로 채워진 삶을 산다.
신기함에서 부러움으로,
부러움에서 비교로 바뀌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부’는 여전히 욕망의 일순위다.
문제는, 타인의 삶이 너무도 쉽게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들여다보는 창이
어느새 나의 거울이 되어버린다는 것.
원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삶과 내 삶을 견주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이도 그럴 거라고,
무심히 일반화해버린다.
언젠가
징징거리는 친구를 위해 마음과 물질을 쏟은 적이 있었다.
기꺼운 마음이었다.
밥값도 내가 먼저, 좋은 하루 보내라고 커피 쿠폰도 보냈다.
좋은 글귀를 전하고, 진심으로 기도했으니
그건 결코 댓가를 바란 선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는 일만 계속되고,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그 마음은 서서히 서운함함으로 변질되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가는 태도에,
힘들다면서도 나보다 더 잘 먹고 잘 입는 모습에,
내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친구를 달리 보게 되었다.
오랜 친한 친구였음에도.
거리두기를 생각하며,
'기브 앤 테이크'를 싫어하던 내가
“그래도 이 정도는 기본 아니야?”라는 기준을
조용히 마음에 세우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 순간 나는 사람을, 마음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많다는 생각,
그 계산이 마음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진심도 흐려지기 시작했으니까.
돈은 그 자체로 나쁘지도, 더럽지도 않다.
삶에 꼭 필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수단이 기준이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람의 태도를 해석할 때,
감정의 크기를 짐작할 때,
심지어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가늠할 때조차
우리는 돈이라는 잣대를 은근히 꺼내든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그 틀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아니, 얼마나 정직한가.
비교하고, 계산하고,
마음보다 외형을 먼저 보는 순간들.
진심을 숨기고,
내 안의 작아진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괜찮은 척한 날들.
그리고
그런 나를 문득 알아차릴 때,
마음 어딘가가 쿡, 하고 찔린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나서,
돈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크게 남았다.
소설이 던진 메시지보다,
그걸 통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더 오래 가슴에 머물렀다.
나는 돈 앞에서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가.
내가 베푸는 친절에는 연민이나 우월감이 섞여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받는 감사는, 내 마음의 크기와 다르지 않은가.
나는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 위축된 적이 있었던가.
없는 사람 앞에서 은근한 우위를 느낀 적은 없었을까.
감사 대신 비교를 먼저 떠올린 날은?
사람을 돈으로 판단한 적은?
내 삶에서 돈은 얼마나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부피가, 내 감정과 관계와 태도까지
조용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나도 모르는 사이
돈이 내 마음을 조용히 휘어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맙다는 말 속에도,
미안하다는 감정 속에도,
숫자의 그림자가 은근히 섞여 있는 것 같다.
내가 진심이라고 믿었던 마음들 안에는
어쩌면 크고 작게 환산된 계산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걸 부정하지 않기 위해,
나는 자꾸만 나에게 되묻게 된다.
감사의 무게를 숫자로 매기지 않고,
관계의 높낮이를 지갑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은 나는,
오늘
무엇을 기준 삼아 살고 있는가.
돈보다 마음이 먼저인 사람.
적어도 그렇게 살아내고 싶은
조용한 다짐을 남긴다.
그럴 필요 없는데,
아니 그래선 안되는데,
언제나 '경제적 인간'으로만 살아가게 되어버린 우리가 이 책에 있다. 그들은 제 이웃을 제 돈과 같이 사랑하거나 그보다 덜 사랑한다.
_ 신형철 문학평론가 <안녕이라 그랬어> 중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