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지 않음의 쓸모
피스타치오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면
아마 바닐라 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을 거야.
그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피스타치오가 얹힌 맛.
하지만 부서져 있었기에,
그 고소함은 혀끝에서 더 또렷하게 퍼졌지.
원래 모양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본연의 맛은 더 선명했어.
부서졌기에 가능했던 고소함,
깨어졌기에 비로소 드러난 진짜 맛.
문득, 피아노 앞에 앉으며 같은 생각이 들었어.
검고 하얀 건반을 가진 이 묵직한 물체는
누군가의 손끝이 닿지 않는다면
그저 조용한 가구일 뿐이야.
하지만 소리를 아는 손 아래 놓이는 순간,
그건 악기 그 이상이 되지.
삶과 감정을 품은 예술이 돼.
그 순간만큼은 그 자체로 말을 해.
피아노는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없어.
연주자에게 온전히 맡겨야만 하지.
마치 우리 삶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뜻밖의 순간들에 의해 깨어지고, 흔들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에,
사랑하던 이와의 관계에서,
나도 모르게 부서지고 있는 나를 느낄 때가 있어.
금이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땐 아프지.
당연히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깨어짐 속에서 나는
더 나다워짐을 발견해.
무너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들,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 나의 속마음.
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진짜 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아.
어쩌면,
나를 더 나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지도 몰라.
가장 고소하고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 되기 위해
피스타치오의 모양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꾸만 나를 흔들고, 깨어지게 하는
관계나 환경이 있다면
가끔은 애써 붙들지 말고
조용히 내버려 두자.
그 틈 사이로 환한 빛이 스며들지도 모르니까.
보지 못했던 ‘나’를 비추고,
그렇게 나는 더 나답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나의 쓸모를 다하며.
사실, 깨어짐은 능동태가 아니었어. 스스로 깨어질 수 없는,
누군가가 깨뜨려야만 깨어질 수 있지.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려고 애쓰고,
스스로 고난을 감내하려 애쓰고,
스스로 강한 척하던 시간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내가 깨어진다’는 착각 속에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진짜 깨어짐은,
내가 아닌 타인이나 삶의 어떤 순간들이
예고 없이 나를 부딪치고,
모양을 바꾸고,
금이 가게 할 때 찾아오는 거야.
흔히 우리는
삶은 완전함이나 성취를 향해 가야 한다고 믿어.
남김없이 해내고, 흠 없이 이겨내고,
조각 하나 없이 완전한 나를 꿈꾸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깨어짐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더라.
깨어짐이 단지 고통으로 끝난다면 억울하고 허무할텐데
내가 완전해지기 위한 과정,
부서지지 않고는
온전히 드러날 수 없는 나의 본질을 아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아.
결코 머무르지 않을, 지나갈 고통에 감사하며 말이야.
이 과정이 삶인 것 같아.
가장 나답게 사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