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의 스타카토를 연주하는 법

뾰족하고 날카롭지 않게

by 서나송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악보 위 점 하나, 즉 스타카토 기호를 보면 그저 ‘짧게’만 연주한다. 악보 위 점 하나가 ‘톡 끊어 치라’는 단순한 표시로만 보이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반 앞에 깊이 앉을수록 그 점 하나 안에 얼마나 많은 길이와 색채가 숨어 있는지, 그리고 그 짧음이 얼마나 긴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알게 된다.


사전적인 정의는 간단하다. 스타카토는 음을 그 길이의 절반 정도로 짧게 끊어 연주하는 것. 그러나 실제 피아노 위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손끝의 섬세한 압력, 손목의 유연한 탄력, 건반과 손가락 사이의 공기까지 함께해야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 바로 스타카토다. 맑은 물방울이 바위에 부딪혀 투명하게 튀어 오르듯 맑은 소리가 될 수도 있고, 잔설이 발밑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듯 날카로운 소리가 될 수도 있다. ‘짧음’이라는 한마디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표정이 그 작은 점 안에 깃들어 있다.


아이들 중에는 스타카토를 ‘날카롭고 뾰족하게’ 끊어 연주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소리가 허공으로 날아가 사라져 버릴 만큼 건반을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스타카토는 결코 소리를 찌르듯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공기 속에서 둥글게 맺히는 짧은 울림이라고. 손끝이 건반을 살짝 누른 후 포근히 놓아줄 때, 그 짧은 음은 둥글고도 깊은 빛을 머금는다. 짧지만 투명하고, 짧지만 단단하게 여운이 남는 음, 그것이 바로 스타카토인 셈이다.


나 역시 한때는 그저 ‘짧게’만 연주하는 것에 몰두했다. 좋은 소리는 잊은 채, 그저 짧음을 흉내 낼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길이가 짧아지는 만큼 소리는 흩어지고 음악은 살아나지 않았다. 때로는 너무 딱딱한 음색으로 건반을 때리는 듯한 소리만 남을 뿐이었다. 생각하고 연습하기를 반복한 끝에 알게 된 길은 손목의 탄력과 팔의 무게였다. 건반을 툭 치고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되, 소리가 공기 속에서 부드럽게 머물도록 남기는 것. 그 순간 건반이 스스로 숨을 쉬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스타카토는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 소리를 위한 재빠른 숨 고르기, 다음을 준비하는 여백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대개 매끈한 선율을 원한다. 끊김 없이 흐르고, 잡음 없이 이어지는 인생, 늘 따뜻하고 부드러움만이 가득한 관계를 바란다. 그러나 오선 위의 음악은 언제나 다양한 길이의 스타카토와 레가토가 뒤섞여야만 더 온전한 곡이 된다. 긴 레가토가 강을 이루듯 흐를 때, 스타카토는 그 강물 위로 반짝이는 윤슬을 만든다.


뾰족하게 끊어내지 않는 삶의 스타카토


삶에서도 우리는 끊어야 하는 순간을 만난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나 일의 끝맺음을 너무 날카롭게 끊어내곤 한다. 불편한 마음을 정리한다며 뾰족한 말을 던지고, 마지막 대화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다. 하지만 진정한 이별과 마무리는 둥근 울림이어야 하지 않을까. 스타카토가 짧지만 깊은 음색을 품듯이 말이다. 관계도 뾰족하게 끊기보다 그 속에 따뜻한 여운을 남겨두어야 한다. 짧더라도 부드러운 여백이 있어야 마음속의 다음 이야기가 아프지 않게 시작될 수 있다. 짧지만 울림을 품고 있는 스타카토처럼, 관계의 끝맺음 역시 여운을 잃지 않아야 한다.


정성으로 빚어내는 삶의 스타카토


음악에서 스타카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곡가는 그 짧은 점 하나에 곡의 숨결을 담는다. 소리를 끊어야만 다음 이야기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다. 우리 또한 예상치 못한 짧은 순간들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카토를 만난다. 그때 필요한 건 분노나 조급함이 아니다. 짧아도 오래 남는 울림은, 그 찰나의 순간을 사랑과 온기로 품고 끊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인생의 스타카토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결국 내 삶의 선율과 성품을 빚어내는 것 아닐까.




건반 밖 엄마, 서나송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