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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이 화음이 되기까지

흔들려도 괜찮아

by 서나송
여럿이 부르는 신음을 우리는 화음이라 한다.



정끝별 시인의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속 문장 하나가 마음의 속도를 멈추게 했다.

마치 들숨과 날숨 사이, 숨조차 멎는 찰나처럼. 그 짧은 문장이 나의 지난 시간을 되감기처럼 돌려놓았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무대 위의 찬란한 순간은 언제나 고요하고 외로운 연습실에서의 수많은 인내 끝에 찾아오는 결과였다. 정말, 신음처럼 힘겹게 버틴 순간들이 더 많았다. “전공이 피아노예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조명을 받으며 연주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나에게 음악은 기도와도 같았다. 찢기고 무너지는 날에도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 간절한 끈. 사실은 너무 미숙하고 불완전해서 붙잡을 수밖에 없던 것이 음악이었고, 기도였다.


피아노 한 대로 가득 찬 좁은 연습실에서도 내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막을 두드렸던 날들. 새처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시력은 있었지만, 악보 속 음악은 왜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을까.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악보 앞에서 눈을 비비고 또 비비며 버틴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 밥도 굶어가며 연습해 간 레슨실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부분에서 호된 지적을 받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혼이 났다. 나름대로 성실히 준비했는데, 늘 부족했고, 그 부족함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나를 조용히 무너뜨렸다.





신음은, 나의 또 다른 언어였다.


마음속에 조용히 울리는 앓는 소리들. 누가 들어주지도, 위로해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어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나의 신음은, 그렇게 매일을 살아내기 위해 흘러나온 절박한 소리였다. 외로운 연습실에서, 연주 전 떨림 속에서, 결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간절한 기도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그 소리들은 사실 음악 이전의, 삶 그 자체였다.


동료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외롭고 힘들 때, 나와 같은 처지의 친구들마저 나보다 나아 보였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나는 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내 신음은 너무 작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의심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 신음들이 모여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음악에서 화음이란 두 개 이상의 음이 동시에 울릴 때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음정과 색을 가진 소리들이 어울리고, 때로는 부딪히면서 울림을 만든다. 그것을 우리는 협화음이라, 혹은 불협화음이라 부른다. 신음들이 모여 만들어낸 화음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실이 있다. 진짜 사람이 살아 있는 소리.


삶이라는 악보 위에서 우리는 종종 삐걱거린다. 내가 내는 음과 내가 되고 싶은 음 사이의 간극, 기도와 원망이 동시에 숨 쉬는 마음, 사랑을 말하면서도 짜증을 먼저 내는 하루.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율되지 않아도, 다듬어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소리다. 내 안의 수많은 목소리들—포기하고 싶은 나, 끝까지 가보자고 다짐하는 나, 용기 내는 나와 자꾸 움츠러드는 나—이 다양한 소리들이 어지럽게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일상의 화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율’이 아니라, 어쩌면 ‘포용’ 일지도 모른다.


불협화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걸 믿는 것. 거친 음을 감싸 안고, 흔들리는 리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내 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것. 어긋나고 떨리는 나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이 음악이 되는 첫걸음이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엄격한 기준을 쥐고 있었다. 완벽한 협화음만이 음악이고, 맑고 깨끗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떨리는 고백과 불완전한 음정들이 모여 진짜 노래가 된다. 진심이 담긴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부족한 나, 더 잘하고 싶었던 나, 만족하지 못했던 나, 포기하고 싶었던 나, 그래도 성실하고자 애썼던 나. 이 모든 나의 소리들이 모여 울릴 때, 비로소 진짜 나의 화음이 만들어졌다. 그 소리를 억지로 조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가장 정직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왔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 안의 신음, 그것도 화음이 될 수 있다고. 우리가 함께 부르는 신음은 곧 이 삶의 화음이며, 처연하고도 찬란한 노래라고.


그래서 나의 목소리를 꺼낸다. 누군가의 신음을 듣고, 함께 화음을 만들어가길 바라며. 당신의 소리에 나의 소리를 기대고, 나의 소리에 당신의 소리를 보탠다면, 그건 분명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화음이 서로의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리리라 믿는다.



건반 밖 엄마, 서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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