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채워지지 않은 공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느껴지는 불안감. 자신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오늘 역시 사무실에 들렀다. 누구의 자리로도 보이지 않는 낡은 철제 책상에 앉아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그때 느껴지는 애처로운 눈빛들에 못 이겨 그곳을 잠시 나와 걸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쓰레기 더미 사이를 걷는데 그곳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내 한숨에도 섞여있는 듯 뜨겁고 더러웠다.
“어디니?”
“네. 들어가겠습니다.”
짧고 단호한 말투에 만족하고 있던 차 주어진 종이에 다시 한숨이 나왔다. 가방에서 꺼낸 다이어리에 종이를 꽂아 덮었다. 다시 채워질 것이다. 채도는 더욱 낮아지고 결국 차가워질 정도로.
똑같은 모양의 직사각형 건물 숲을 걸었다. 값비싸고 화려한 물건들로 가득한 건물들에 비친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다. 눈앞에서 본 것 마냥 깨끗하게 비진 그 모습은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 같았다. 그 모습이 불편해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걷고 있는 거니. 귓가에서 맴도는 질문에 답할 수 없어 귀까지 막고 다시 걸었다. 어느새 몸은 젖었고 달궈진 볼이 뜨거웠다. 그 열은 몸 전체로 번졌다. 몸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 곧 쓰러지겠지. 이러다 누구 하나 죽어야 정신을 차리지. 매달 해오던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 걸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다이어리를 펴다 떨어진 종이를 줍지도 않고 쳐다만 봤다. 저 속에 나는 있나. 나도 아닌 것을 안고 살아야 하나. 진짜가 사라질 때 종이는 너덜너덜해져 쓰레기통에 처박히겠지. 종이를 다시 주워 다이어리에 꽂아 넘겼다. 그리고 그날을 기록했다. 무엇을 봤고 얼마큼의 성과를 이뤄냈는지 빼먹은 일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리고 남은 것들을 되뇌고 또 되뇌다 사람들의 시선에 깨어났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낯설지 않았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 하나둘 사라지는 시선을 확인하고 다시 하던 것을 했다. 언제 또 이것들을 잊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나와 전철을 탔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전철 칸에 파란빛이 채워져 있었다. 잠시 그 빛을 잡고 아직 남아 있는 열기를 식혔다.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전철에 반대로 달리는 자동차. 줄에 맞춰 그 모습을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빨간 노을이 점차 전철 안에서 내 손으로 번져 따뜻해져 왔다. 뜨거운 것을 원했던 게 아니었는데. 몇 분도 되지 않는 그 순간은 오늘을 압도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던 일들이 저 강 너머로 없어져버린 듯했다. 다시 시멘트 바닥이 나왔고 다를 것은 없었다. 다시 걸어갔다. 내가 없지만 내가 쉴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