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질리지 않을 파랑에 대하여
하늘은 신 혹은 절대자를 빗댈 때가 많다. 특정한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하늘에 대고 빈다거나, 하늘이 도와줄 것이라든가 하는 관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이때 사람들이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하늘의 사전적 의미)을 생각하며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향해 비는 건, 신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전능한 힘으로 해결할 막연하고 추상적인 무언가이다.
나는 무늬만 모태신앙으로, 사실 신앙심이 없는 무신론자이다. 초등학교 때 성당에서 판타지소설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걸 믿어말어, 하고 있을 때 엄마(역시 무늬만 천주교)는 그건 사람들이 믿을 구석을 위해 지어낸 것이라고 했다. 마음 의지할 데 없을 때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해서 그에게 모든 걸 맡기면 자신의 책임이 덜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 아주 나중에서야 이해했던 것 같지만.
패션 천주교 신도인 나는, 주로 다급할 때 하느님을 자주 이용했다. 예를 들면 화장실이 아주 급할 때, 시험을 앞두고 요행을 바라고 있을 때, 다리에 쥐가 났을 때. 너무 절박한 상황이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아무것도 없거나 불안감을 떨칠 행동을 할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온 힘을 다해 하느님 예수님을 찾았다.
기도는 진심을 다하기만 하면 격식 없이 캐주얼하게 해도 된다고 배웠기에 ‘하느님, 제발 이번 위기만 넘기게 해주시면 다음부터는 제가 잘 할게요. 착하게 살게요.’라고 속으로 징징거렸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옛말처럼 막상 위기를 넘기고 나면 기도의 절실함은 온데간데없다. 착하게 산다는 약속은 고사하고 하느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급한 일이 찾아오면 다시 배은망덕하게 하느님을 소환해 같은 기도를 했다.
‘죄송한데 이번만 마지막으로 도와주시면...’
하지만 급하고 절박한 상황이 그리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다. 생리 현상이나 예상치 못한 신체 고통과 관련된 걸 제외하고는 안 좋은 상황은 대개 느리게, 분명한 예고와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건 반짝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역시 느리게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도 했다. 급박한 불운이 아닌 느리게 찾아온 절망 상황에서는 하느님 따위의 개념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는 하느님을 찾는 대신 지난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상상했다. “내가 왜 그랬지.”와 “잘 안 될 것 같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대개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들만이 종교에 의지한다는 어떤 편견과는 다르게, 종교에 충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가끔 태산처럼 단단해 보인다.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젠가는 잘 될 거라는 무한 낙관의 태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무한 감사의 태도, 오늘 울어도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는 무한 성실의 태도.
좋은 일에 대해서 “신이 도우셨네.”, 안 좋은 일에 대해서 “내가 기도해줄게.” 라고 말하는 그들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가끔은 그 말에 나도 묘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들의 단단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선 급할 때 이용할 신이 근처에 있다는 안정감일 것이다. 내가 아주 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만 소환할 수 있는 신을,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많은 상황에서 수시로 꺼낼 수 있다. 자신을 언제든 서포트해 줄 존재와 함께 홈그라운드에 있는 느낌일 것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고향에 있는 느낌일 것이고, 내가 약해질 때 나를 지켜줄 힘센 연장자와 늘 함께하는 느낌일 것이다.
신을 중심에 두고 일, 공부, 취미, 관계 등 자신의 표면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자신을 둘러싼 부가적언 것으로 분리하여 둘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내가 가진 것, 하는 것 중에 어느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신의 중심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저 소유한 것 중 하나에 흠집이 난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러니 믿음의 방향이 내부가 아닌 바깥을 향하는 것도 꽤 괜찮은 것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지만, 그건 어쩌면 신을 믿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몸 중심에 기둥을 꽂아둔 사람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기둥과 함께 쓰러질 수도 있는 거지만 몸 바로 옆에 꽂아두는 사람은 바람이 불 때 기댈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스스로도, 신도, 그 밖에 있는 어느 것도 믿지 못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게 있을까?
'과거의 나'를 믿는 신도들이 꽤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마주했을 때 전에 겪은 더한 어려움과 비교하면서 ‘그때도 버텼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게 뭐야.’라고 생각한 적 한번이라도 있다면 당신 또한 분명 ‘과거의 나’ 신도다.
과거에도 분명 힘든 일이야 있었겠지만 그걸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건재한 나. 지금 돌아보면 우스워도 당시엔 그렇게나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온 나. 그렇게 강했던 과거의 나라면, 지금쯤은 더 강한 나로 자라 있지 않을까? 그런 믿음.
내가 그나마 무언가를 믿고 의지한 적 있다면 그건 '과거의 나'이다.
하지만 이 믿음의 약점이란 조그마한 이유에도 줏대 없이 흔들리는 의심 많고 얕은 믿음이란 것이다.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른데? 그때 상황보다 지금 상황이 더 안 좋으니까 이번엔 지고 말 거야. 그때의 나는 튼튼했지만 지금 나는 약하니까 지고 말 거야. 내가 여태 자란 게 아니라 늙은 거라면? 그래서 강해지기는커녕 쇠약해졌다면?
믿음을 방해할 만한 이유는 늘어놓자면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도 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어려운 문제다. 하물며 종교에서도 의심을 버리고 신앙심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한다. 교리나 기도문, 이를 정리한 경전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나만의 교리를 세워보려고 한다. ‘과거의 나’를 의심 없이 믿기 위한.
하녕 제 1장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한순간이라도 들었다면 그것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맞다.
그것이 정말 다른 이 아닌 네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늘 점검하여라.
생각이 너무 길어질 땐 땀이 날 정도로 달린 후 물로 씻어내거라.
과거의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들 땐 플랭크를 하며 몸과 정신을 수양하거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는 무조건 나은 사람이리라.
물론 너무 길어지거나 와닿지 않으면 안 된다. 주기도문처럼 언제나 외울 수 있을 만한 양에 오랫동안 간직해온 생각이어야 할 것이다.
나 혼자 만든 억지 교리면 어떤가? 근거 없고 터무니 없는 믿음이면 어떤가?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 됐든 상관 없다. ‘과거의 나’를 의심 없이 굳게 믿을 수 있게 돕는 장치가 되어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신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전능한 힘으로 해결할 막연하고 추상적인 무언가를 빗대는 것이 '하늘'이라면, 지금의 내가 믿고 의지할 하늘은 '어제의 나'다. 기댈 존재를 옆에 둔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든든하고 안전한 하늘이 있다.
이 믿음으로 ‘현재의 나’를 지켜내면 그 다음에 오는 ‘미래의 나’에겐 다시 믿음직하고 든든한 ‘과거의 나’가 주어진다.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의 하늘이 될 거란 계산은 나로 하여금 지금의 나를 최선을 다해 강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두려는 동기가 된다.
내 신앙은 말하자면 그렇다.
오늘의 나는 과거에 나에 기대어,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에 기대어...
이하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