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연(食緣),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방금 만들어낸 말이니까.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식당이 하나 있는 것 같긴 한데, 관계자가 아니라는 말은 미리 해두겠다. 어쨌든 식연이란 무엇인가. 혈연이 피로 이어진 관계인 것처럼, 식연은 바로 음식으로 이어진 관계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아니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 이어진다. 한솥밥을 먹는 가족, 급식과 학식으로 표현되는 소속감. 음식으로 상징되는 기념일, 잔치는 한두 가지인가. 결혼식에서는 양가 어른들이 케이크를 함께 썰고, 내가 죽어서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육개장을 나누어먹을 것이다.
이렇듯 음식이 인간관계에서 중요한데, 그걸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 게 아쉬워 이 기회에 한 번 만들어보았다. 그런데 음식에 대한 애정이나 성향 등에 따라 식연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어쩌면 식연이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식연을 적극적으로 쌓고 싶은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 혹은 계속 이어가는 게 어려운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내 주변의 식연의 대가(大家) 두 명을 소개하고 싶다. 나의 동갑내기 친구 T양과 (내 글의 단골손님인)우리 엄마다.
T양의 사례는 다른 이와의 식연을 시작하고 또 넓혀가고자 하는 대학생들에게 특히 유용할 듯하다. 내가 T양을 알게 된 것은 지난해 9월 초. T양은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내게 지난 학기는 새로운 학과에서의 첫 학기였다. 새 학과의 친구에 무척 굶주려있었다. 개강 첫날,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가던 T양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하와이안 셔츠가 인상적이었던 그는 예의 있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쩌다보니 우리는 같이 걸어가다가 딱 점심때라 그 길로 학식을 먹게 되었다. T양은 반찬으로 나온 감자볶음을 씹으며, 갑작스럽게 “이번 학기 우리는 밥 친구야”라며 하와이안마냥 상큼하게 말했다. 만난 지 30분도 안 되고 들은 말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친구 한 명이라도 생긴 게 어디냐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T양과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다가 “다른 친구도 와도 돼?”라고 물어서 흔쾌히 승낙했다. 한 친구가 합류했다. 그 친구도 매점에서 라면을 먹게 되었고, 어느새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가 되었다. 또 며칠 뒤, 과방에서 만난 T양의 동기와 과자 모임을 가졌다. 다음 날에는 과자 모임에 더해 T양의 ‘동기의 동기’도 합류해 넷이서 학식을 먹게 되었다. 이외에도 단기간에 T양의 주도 하에 착실히 식사나 간식 타임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학과 사람들과 첫 만남부터 무언가를 먹으면서 이상할 정도로 많이, 부쩍 친해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T양이 간다고 해서 신청한 답사를 어쩌다 나만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고기와 밥과 상추를 나누어먹으며 후배들-T양은 다 아는 사람들-과 친해졌다. 어느 날은 T양과 그의 동기와 같이 복도를 거닐다가 (알 수 없는 흐름으로) 우연히 마주친 학과장님과 파스타를 먹게 되었다. 그 길로 새 단과대의 학과장님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나중에 밥도 한 번 따로 먹으며 진로 상담을 하게 되었다.
화룡점정은 T양 어머니와의 저녁식사였다. 가을 말엽의 어느 저녁, T양이 멀리서 사는 어머니가 자신을 보러 왔다며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알게 된 지 두 달 밖에 안 된 T양의 어머니와 부대찌개 집에서 만나 그릇에 소시지를 덜어드리고 있었다. 쿠키와 곶감까지 받아들고 집에 가면서, 내가 T 양의 거대한 ‘식연망(網)’ 위의 한 점이 되어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식연의 대가, T양의 수완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의 서글서글한 점도 한몫했겠지만, 사람들이 첫 만남에 식사하는 걸 의외로 꺼리지 않는 걸 알고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느낀 바로는, 약속이 없다면 웬만해서 밥 때에 밥을 거절하는 게 쉽지 않다.
나중에 T양에게 들어보니 자취생활이 길어지면서 누군가와 같이 밥 먹는 일의 따스함을 느꼈다고 한다. 은은하고 의외로 조용한 T양이지만, 일상에서도 맛밤이나 젤리를 챙겨와 작은 거라도 나눠먹는 그의 마음이 식연의 대가로 이끈 것이리라. 그 덕분에 나는 새 학과에 잘 안착해낼 수 있었다.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면 인연됨이 한결 쉬워지는 건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닐 거다. 매년 3월, 캠퍼스 주변 아기자기한 맛집들이 ‘밥약(속)’을 하는 신입생과 선배들로 북적이는 현상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꼭 마주보고 하는 식사가 아니라도 그렇다. 엠티에 가면 야외에서 (고학번들이) 숯불에 고기를 구워 접시에 덜어주면 기다란 테이블 저쪽으로 손을 모아 건네주며 하는 야외 식사에서 서로 이름을 알게 되고, 학창시절에는 사탕이나 과자라도 들고 가면 하나만 달라고 온 친구들과 안면을 튼다. 그렇게 ‘식연’으로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우리 엄마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 특히 혈연과의 인연을 돈독히 하고픈 어른들에게 롤모델이 될 법하다. 혈연. 이 단어가 만들어졌을 그 의도만큼이나 진하고 끈끈한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 중요한 음식이 있다. 특히 한국인에게만큼은 식연 중에서도 ‘최고 단계의 식연’의 상징이랄까. 예상하다시피, 바로 김치다. 엄마는 김치를 통해 식연을 돈독히 한다.
우리 엄마는 외가, 친가를 통틀어 T양을 방불케 하는 친화력의 소유자다. 4명의 시누이들과도 사랑하고 있으니 보탤 말이 없다. 이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때는 다름 아닌 초겨울이다.
지난겨울 초엽, 우리 집에는 자그마치 네 군데에서 김치가 왔다. 둘째, 다섯째 고모에게서 하나씩, 넷째 고모의 남편 분의 친척집(?)에서 하나, 외갓집에서 하나. 이외에도 고모할머니 댁이나 이웃, 어머니의 악기 동호회 친구에게도 조금씩 받았으니 실제로는 더 된다고 봐야겠다.
어른들이 김치 좋아하는 것은 어느 집에서든 관찰될 만한 사실이지만 우리 엄마는 좀 남다른 면이 있다. 일단 모든 음식에 김치를 곁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냥 간식으로 김치만 먹기도 한다. 그리고 빵을 너무 사랑해서 빵을 만들기 시작한 사람, 자동차를 사랑해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사람처럼 김치를 만드는 공정까지도 즐긴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6년 전까지 친가에서 김장은 모든 식구가 반드시 모여야 하는 최대의 거사(巨事)-노동-이었다. 다른 며느리라면 꺼릴 법한데도 어머니는 유난히 신나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전라남도까지 가야했다. 다섯 시간 걸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자동차 뒷좌석의 오빠와 내가 불퉁하게 툴툴대어도, 엄마는 너네는 김장이 얼마나 설레고 멋진 일인지 모른다며 가볍게 대꾸했다.
도착하자마자, 스무 명 남짓의 가족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빼놓은 절임배추 몇 백 포기를 대야로 나르고, 다른 대야에는 온갖 비싼 젓갈과 귀한 고춧가루를 섞어 양념을 만들었다. 어른들이 배춧잎 한 장 한 장 양념을 바르는 데 결코 허투루가 없었다. 하얀 부분이 보이면 바로 검거되었다. 그렇게 배추를 통들에 담기까지 한나절, 비닐과 김칫국물을 치우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마침내 모두가 김치를 나눠 갖고(이 과정도 전쟁이다. 다른 가족들에게 더 가져가라고 소리치는 훈훈하고 무서운 광경…) 겨우내 우리 차 뒷좌석에 탔지만 트렁크에 못 들어간 통들을 뒷좌석의 아래 공간에 실어 발 둘 곳 없이 앉아 5시간 걸려 다시 서울로 왔다.
왜 김장을 할까.
어린 나에게는 의문이었다. 가장 기진맥진해 보이는 사람이 엄마였다. 그러나 항상 지치는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와도, 헐레벌떡 통을 들고 오면 김치 통을 열어 배춧잎 하나를 길게 찢어 맛보며 본인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없다 했다. 이렇게 맛있고 비싼 김치를 얻다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니. 이런 건 정말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니야.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이제 우리가 직접 김장을 하자며 김치를 담가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별로 맛이 없었다. 양념이 뭔가 부족했고, 배추도 왠지 시들시들했다. 그때서야 친가에서 하던 김장이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갔었는지 처음으로 인식했다. 엄마는 사먹자고 해도 계속 온갖 종류의 김치를 연마하시더니, 어느새 꽤 잘하게 되셨다. 그리고 자신의 김치를 주변에 사는 고모나 이모에게도 나누었고 고모들도 자기 집에서 김장을 할 때에 꼭 엄마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겨울만 되면 엄마는 주말에 바빠졌다. 택배로 오는 김치도 있지만, 엄마가 직접 기서 참여하는 김장이 두 군데는 된다. 네 식구가 사는 집인데, 김치 냉장고가 항상 꽉꽉 차있다. 언제 먹나 싶은데 놀랍게도 금방 사라진다. 오늘 저녁은 둘째 고모네 김치야, 내일은 외할머니 김치를 먹고, 이거 파김치는 엄마가 담근 건데 먹어 보렴.
여럿이 모여 고된 김장을 하고, 자기 집의 김치를 선뜻 다른 이에게 주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누군가 매일 먹는 음식이 내가 준 것이기를, 또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진한가. 김치는 쉬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재료 선정부터 포장하기까지 지난하기 그지없는 노동과 정성과 사랑의 집약체이다. 자신의 마음이 항상 그의 식탁 위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색채일까. 몇 년 전 기숙사에 살 때 항상 내게 전화해 “김치는 있니?”의 물음은 어떤 색깔이었나. 어쩌면 피보다도 진한, 가장 빨간 마음이지 않을까.
더구나 예전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유일한 반찬이 김치였으니, 김치를 나눈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너는 나의 인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렇듯 같은 음식을 먹고 나누는 것은 무척 깊은 의미를 갖는다. 한솥밥이라는 말도 있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의 솥에서 지어진 밥, 즉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 밥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그 밥을 몸에 지니게 된다. 김치도 그렇다. 우리는 같은 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을수록 우리는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식구(食口)란, 속이 닮은 사람들이다. 식구끼리의 친밀감은, 나와 비슷한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애정의 발현이 아닐까? T양과 연속 5일 동안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학기, T양이 진정한 나의 식구가 아닐까? 어느 날은 집에서 고모의 김치를 먹으면서, 고모도 오늘 나와 같은 김치를 먹었겠지- 그럼 오늘은 고모와 한층 비슷해졌군, 툭 단상이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그저 짧은 생각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미식가 ‘장 사바랭’의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적극적인 식사 권유를 통해 식연을 시작하고 넓혀가는 T양과 식연의 붉은 상징인 김치로 인연을 지속해가는 우리 엄마. 두 식연의 대가들은 어떤 사람일까. 인싸? 아니, 이 말은 대가들에게 너무 얄팍하다. 사바랭은 이렇게 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