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일째, 서른
서큘레이터가 왔다. 서른 번째 생일을 앞둔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최저가만 좇는 습관은 잠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최저가를 제하고도, 생각할 게 한둘이 아니다. 첫째, 앙증맞은 나의 방 한 칸 집에 어울릴 만큼 덩치를 가져야 하고 키도 작아야 한다. 침대 바로 옆 지름 60cm 정도의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아둘 계획이기에 적당히 작고 왜소해야 하는데, ‘적당히’라는 건 세상에서 제일로 주관적이고 어려운 조건이다. 둘째, 공룡기업이 아닐 것. 집 안의 전자기기 종의 다양성 보장을 위한 집구석 생태계 보호의 일환이다. 동시에 주먹구구식으로 ‘팔면 그만’의 아우라가 풍기는 기업 말고 생소한 브랜드라도 소비자를 생각하는 철학이 담겨 있는 곳을 선호한다.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런 곳은 대개 제품 설명이 친절하고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 외에도 소비전력이나 A/S 유무, 재질과 디자인이 뒤따른다.
이러니 물건을 사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독립한 지 4년 차, 빌린 집이라도 빌린 시간 동안은 오롯이 내가 선택한 물건들로 채우는 집이다. 어떤 물건을 고를지 정하는 일은 고민을 요하는 일이었고 이 고민은 나를 주체적으로 만들었다. 내 곁에 둘 물건을 고르는 일은 곧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나는 검은색보단 흰색을 좋아했구나’, ‘쓰지도 않을, 메뉴에 꽉 들어찬 옵션보다 아쉽더라도 간단한 조작법이 좋다’ 같은 나의 취향들을 톺아보는 시간. 급한 마음으로 쉽게 들인 물건은 쉽게 버려지더라. 그저 입력된 값대로 할 일을 수행하는 로봇처럼 물건에 대해 무감각, 무감정의 상태로 물건을 버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물건을 버릴 때 드는 비용과 환경적인 낭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허무했다.
“벗이라는 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니, 진실로 벗할 만한 덕이 있다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벗 삼을 수 있을 것일세.” 「세 가지 유익한 벗」, 유방선
이 문장을 통해 그때 나는 버린 물건과 벗이 되지 못한 데서 느낀 허무란 걸 알게 됐다. 나는 벗이 될 수 있는 물건을 들이고 싶다.
언젠가 서큘레이터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집을 떠날 때 “서른 번째 생일 선물로 너를 들였었지, 그동안 고마웠다”고, 유난스레 송별해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