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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Sep 23. 2021

풍요 속 절제 배우기

나는 배가 너무 부르다

164일째, 서른

 바야흐로 21세기를 맞은 지도 어느덧 21년째, 많은 사람이 풍요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데 무리가 없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고민은 생존이 아닌 선택의 문제다. 필요한 물건과 정보는 드넓은 인터넷의 바다에서 얼마든지 건져낼 수 있는 시대. 없을 건 없다는 화개장터의 한층 진화된 모습으로, 있어야 할 건 당연히 다 있고 없을 것도 다 있다. 다만 나는 선택 장애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니, 선택하기 전 단계 ‘내가 어떻게 그리고 왜 선택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다. 망망대해에 돛 없는 돛단배 신세다.

 풍요 속에서 절제는 결핍 중 절제보다 더욱 어려운 과제 같다. 결핍을 느끼는 것도 의식하고 노력하고서야 쟁취할 기회다. 오늘만 수십 가지 광고 영상이 나를 통과하고 스쳐 지나갔더라. 유튜브, 넷플릭스에 들어가면 조금만 한눈팔면 몇 초 안에 예고편이 저절로 재생되고 뇌보다 빠른 손은 이 영상, 저 영상을 순간이동 하듯 옮겨 다니고 전지전능한 손놀림으로 앞으로 10초, 뒤로 10초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히어로는 내 손에 있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과식하고 난 후 느끼는 소화불량처럼, 익숙한 오늘의 풍요에 새삼스레 배가 너무 불편한 거다. 앞으로 나아가진 않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노 젓기를 잠시 관두었다. 손가락 히어로에게 쉼을 주기로 했다. 두 눈에 들어오는 방대한 시각 정보에도 잠시 멈춤 버튼을 눌렀다. 미소 지어지는 포만감을 느꼈던 게 언제였던가. 나는 배가 부르다. 불러도 너무 부르다.

 몇 년째 배부른 소리만 해대다 겨우 오늘 굶는 소리를 하기로 했다. 결핍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바쁘게 장바구니에 물건을 채우지 말고 결핍을 느끼자. 우선 없이 살아보자. 그랬을 때야말로 결핍을 느끼고 나의 필요를 알 수 있다. 블로그에서 요리 레시피를 보고 요리하되, 재료에 한두 가지 없어도 없는 대로 만들어보자. 그랬을 때 ‘없으면 안 되구나’나 ‘없어도 괜찮은데?’를 느껴볼 수 있다. 아쉬운 맛이 나면 그런대로, 나름 괜찮은 맛이 나면 또 그런대로 스스로 만든 결핍의 환경 안에서 결핍을 맛보고 절제하는 힘을 기른다. 바보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오늘은 집을 나서서 의식적으로 광고를 보지 않기로 한다. 지나치는 가게마다 붙어 있는 오늘의 신상품 광고, 버스나 전철을 탈 때 보이는 전광판의 광고. 초점 없는 눈으로 하릴없이 광고를 보는 것과 광고의 세계에서 부러 광고를 안 보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이 배가 너무 부르고 내 몸이 결핍을 원한다. 절제하는 힘을 원한다. 사방의 바다를 보며 바쁜 노질을 멈추고 돛을 만들고 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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