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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Aug 08. 2022

부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수행자(6)

본문1-3 멈추기-비관적 네이밍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의 수행과 경영에 관한 이야기. 본문 1-3 네이밍게임]



2-3. 멈추기 止-비관적 네이밍

다. 비관적 네이밍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창조했다고 하죠. 

바다와 땅, 해와 별들, 식물, 동물들을 모두 다 창조해놓고 맨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했는데 “아담이 생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신은 사람에게 만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굉장한 큰 특권을 준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


그런데 이 특권은 아담에게만 주어진 권한이 아닙니다. 


성경의 이야기 구조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이라는 개별적인 사람을 지었고 그 개인에게만 이름을 짓는 특권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을 창조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누구나 이름을 짓는 특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멘토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선생님이 미국에서 김밥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김밥을 스시라고 불러서 당황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김밥인데 일본 사람들이 밥에다가 뭘 얹거나 말아서 먹는 것을 영어로 변환하지 않고 모두 ‘스시’라고 자기 나라의 언어를 붙여버린 것입니다. 이름을 선점한 자들이 그 시장을 장악하기에 훨씬 유리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더 넓은 카테고리를 자신의 네이밍으로 확보한다면 임자 없는 땅에 깃발을 꽂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한국 사람들이 그 단어를 선점하지 못해서 영토를 뺏긴 것과 같은 것이죠. 이름을 지을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결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떡을 rice cake이라고 영문으로 변환하여 그들에게 맞추려 합니다. 사실 떡을 rice cake이라고 한다고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이 떡의 쫄깃하고 특별한 식감을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우리의 친절에 감동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떡을 떡이라고 하는 편이 그런 류의 음식에 대한 영토를 선점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은 감자밭이라는 브랜드의 젊은 대표는 미국에서 고구마와 닮은 감자 품종에 아예 "고구감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미국 시장에서 GOGU potato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짓는 것이 김밥이나 감자뿐만 아닙니다.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네이밍 게임이라고 봅니다.


김밥이나 감자보다 더 중요한 이름짓기가 있습니다. 



감정에게 이름 붙이기


어떤 사건과 상황에서 그때 느끼는 내 감정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사물에다가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생각의 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감정의 힘입니다. 인간 행동의 더욱 결정적 요인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은 많은 논문들로 이미 증명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현대인들은 이렇게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도 이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놓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공부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실생활에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상대를 설득하려 듭니다. 물론, 대부분 실패로 끝나거나 더 큰 논쟁을 일으키지만 말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이성적인 판단력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감정을 알아채고 그 의미와 그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는 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당국자들부터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 아무도 감정을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 그 밑에 깔려 있는 깊은 욕구, 감정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기는커녕 그런 것이 필요한지 조차도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에다가 정확한 이름을 붙이고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수용하고 감정과 친해지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의 원천을 발견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유전지대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은 다양한 감정에게 다양한 이름을 붙일 줄 알고 자신의 인생을 총천연색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감정에 대한 이름을 기껏해야 기분이 좋다, 나쁘다, 짜증 난다, 대~박... 이 정도가 전부라면 이 사람의 인생은 무채색에 가깝습니다. 능력이 있거나 운이 좋아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사람의 삶은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무조건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와 같은 감정의 밑바닥에는 안타까워하는 마음, 아쉬운 마음, 존중받고 싶은 마음과 같은 부드럽고 섬세한 욕구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한 욕구는 타인에게도 있는 것이어서 그 욕구를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타인과 만날 수 있고 다른 세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의 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아름다운 감정들이 오고 가는 실크로드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의 가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아예 그 실크로드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평생 사막을 건너지 못하거나 차가운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르웨이가 그냥 좀 괜찮은 나라였다가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올라선 것도 그 추운 바다에서 유전지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사막처럼 삭막하게 느껴지거나 추운 북극권의 바다처럼 여겨지더라도 감정에다가 이름을 잘 붙이고 그 밑에 깔린 나의 욕구와 희망을 분명히 만날 수 있다면 사막에서도 기적을 만든 사우디 아라비아처럼, 추운 바다에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발돋움한 노르웨이처럼 풍성한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선악과는 곧 분별심


아담과 하와가 먹고 있는 이것이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미리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먹지 말라!” 고 하면 이상하게 더 궁금하고 먹고 싶지 않나요?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인간의 뇌가 가지는 특성입니다. 점점 더 궁금해지죠.


뿌리가 하나인데 겉으로는 달라 보이는 것, 선과 악


본성상 뿌리가 하나인데 겉으로 볼 때는 둘이 너무도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이죠.


이때의 선과 악은 범죄와 미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싸움을 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일까요?


대부분 내가 선이고 상대가 악입니다. 나는 알지만 상대는 모르고, 나는 옳지만 상대는 틀렸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보기에는 내가 모르거나 틀렸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두 사람의 관점이 이렇게나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비록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갈등은 끊이지 않고 이런 갈등의 불꽃이 바로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선과 악이 한 뿌리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선악과라는 것을 석가모니의 말로 얘기한다면 ‘분별심’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상대를 향한 판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다를 뿐, 누가 틀리고 맞는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실수를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홍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 고 하면 그 사람 머릿속에 즉시 분홍색 코끼리가 떠오릅니다.


사람의 뇌가 기억하는 방식은 “무언가를 하지 말라!”라고 하면 하지 말라는 서술어까지 통째로 문장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이미지로 기억합니다. 


분홍 코끼리라는 이미지만 기억에 남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하지 말라!”라고 해도 자동적으로 분홍 코끼리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라고 하니까 아담 머릿속에서는 계속 선악과가 왔다 갔다 했을 것입니다. 그게 뭘까? 하는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정어는 장기 기억으로 가지 않아 


스케일업으로 나아가는 CEO는 이걸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스케일업을 한다는 것은 장기적인 비전이 있다는 뜻이고 이 장기적인 비전과 실행계획 안에 비관적인 이름을 지어 넣는다면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계속해서 각인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지 말라”라는 서술어는 남지 않고 그 앞의 목적어만 각인되는 것이죠. 


그 이미지만 남게 되기 때문에 결국 바라지 않았던 부정적인 상황이 직원들의 머릿속과 조직의 공기 속에 반복해서 떠돌게 됩니다. 

결국 CEO가 원치 않은 부정적 결과가 열매 맺는데 사실은 CEO가 자기도 모르게 비관적인 씨앗을 뿌린 결과입니다.


비관적인 네이밍은 비관적인 씨앗을 뿌리는 것


스케일업을 꿈꾸는 CEO의 장기비전에는 반드시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의 이름 짓기가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 






이번 한 주도 평화롭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적절한 이름을 붙여 보세요.


지구별 여행 중인 행복한재활의학과 김정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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