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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Dec 20. 2022

이 사람은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이야기


이 사람은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이 내용은 천진난만한 북 튜버 책한민국과 함께 하는 성탄 축하 독서토론 모임에서 함께 나누었던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이야기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제가 띠동갑 친구들과 함께 의대 공부를 하며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릴게요.


29살 때 저희 집사람하고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저희 아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인사하러 갔더니 "위에 형들이 둘이 있는데 너무 급하지 않냐?"라고 부모님이 말씀하셔서 내가 "1년만 기다리겠다. 1년 이상은 못 기다린다. 1년 안에 둘 다 가든지 알아서 하시라." 


그렇게 집에다 통보하고 나서 1년 안에 형님 중 한 명이 장가를 가고 제가 그다음에 1년 뒤에 결혼했습니다.

그때 당시 저희 집도 그렇고 저희도 벌어 놓은 돈이 없어서 교회 형님 댁에 옥탑방처럼 서면 머리가 "쿵!" 닿는 곳에 신혼집을 차렸습니다. 지붕이 뾰족하게 생긴 옥탑방에서 1천만 원으로 전세 살림을 시작했죠.


결혼하고 1년쯤 지난 때였습니다. 


그때가 IMF 때인데 제가 좋아하던 교회 형님이 이제 대구로 내려가시게 되었어요.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도 너무 그 형님을 그리워하니까


아내가 "그럼 우리도 대구로 내려가면 되지."라고 하더군요. 


그 형님은 저보다 15살 정도 많은 분이었는데 LG 화학 다니셨어요. 1998년도에 그분은 그때 IMF 시기에 잘려서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40대 중반쯤 된 아저씨가 회사에서 잘려서 대구로 내려가는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났어요.


"드디어 나 이제 대구에 간다. 좋아하는 목사님 댁 옆에 집을 얻어놨다. 이제 날마다 가서 목사님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소년이 소풍 가기 전날 같은 그런 표정으로 대구를 내려갔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서울에 있는 게 되게 허전했습니다. 제 얼굴이 좀 안되어 보였던지 집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묻길래 사실은 그 형님이 대구에 내려가고 나니까 서울에 있는 게 되게 이상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집사람이 의과대학을 한번 지원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처음에 편입을 권했는데 제가 편입 자격이 안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수능을 다시 보고 의과 대학에 들어갔죠.

원래 문과였는데 문과가 이제 국어나 영어가 좋아서 문과를 하기보다는 수학이 싫어서 문과를 하잖아요. 그 지긋지긋한 수학, 더군다나 이과 수학을 해야 되니까, 수2 까지 다 해야 되니까 공부 시간 중 거의 한 80% 이상은 수학만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어찌 되긴 됐어요.


그래서 의과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찮았습니다. 재수 학원을 종로 학원으로 다녔었거든요.


그때 우리 첫째가 생겼어요.

그래서 돈은 없고 제가 회사에서 퇴직했으니까 신혼살림했던 그 단칸방에 있는 전세금도 털어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만삭이 된 아내와 함께 친구네 문간방에도 갔다가, 하숙도 했다가 별일들이 다 있었는데 그래도 용케 의과 대학에 들어가고 때맞춰서 인턴이 됐어요.


근데 인턴이 되면 그다음에 전공과목을 선택해야 되는데 전공의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을 아래 연차로 받으면 뭘 시키기가 불편하잖아요. 이해는 되는데, 나이 많아서 안 받겠다니까 뭐 어떻게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러 군데 내봤는데 다 안 됐어요.


그때 제일 낙망을 많이 했죠.


나이는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시험이야 다시 치면 치겠는데 나이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무척 답답했죠. 그래서 인턴에서 전공의가 되지 못했는데, 이런 의사를 떨턴이라고 그래요. 떨어진 인턴. ㅠ.ㅠ 


마지막에 1월 정도 되면 자기가 이제 정해진 전공과에 인턴을 2월까지 해야 되거든요. 1월, 2월은 자기가 정해진 전공과에 가서 일을 배우면서 또 도와주고 그렇게 해요. 

근데 나는 무적이잖아요. 적이 없으니까. 시간은 남는데 정말 쓸쓸한 두 달을 보냈습니다. 인턴 과정이 끝나고 난 다음에 응급실에 당직으로 아르바이트하면서 “1년 더 기다렸다가 또 지원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 인터넷 사이트에 공고가 떴습니다. 대전에 있는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전공의가 1년 차 시작한 지 2주 만에 도망갔다는 거예요. 일이 힘들다고 그래서 추가 모집을 한다고 해서 지원했죠. 추가 모집을 했는데 용케 합격했어요.


그래서 대전에 있는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전공의 수련을 하게 됐죠. 그런데 뭐랄까, 제가 뜻한 대로 된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제가 어떤 굳은 의지를 갖추고 해낸 게 아니거든요. 처음에 시작하는 과정도 그렇고 마지막 재활의학과 전공의가 되는 과정도 그렇고 제가 뜻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 같아요.


그래서 중간에 어려운 과정이나 고난이 많았죠. 그런데 고난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양자 역학과 비슷해요. 양자역학에는 양자 꼬임이 있잖아요. 스핀이 위로 하나 가면, 반드시 반대로 내려오는 스핀이 하나 있듯이 늘 이게 쌍이 있어요.


그래서 고난 중에 소망이 있는 사람한테 뭔가 먹을 게 있습니다.


제가 한 달 전쯤에 유튜브를 봤는데 44세에 의과대학에 들어간 사람의 스토리가 유튜브에 떴어요. 한 150만 정도가 봤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봤죠. 이분은 44살의 의과대학을 들어갔는데 지금 의대 1학년인데 처음부터 잘났어요. 처음부터 과학고 들어가고, 시험 보면 전국 상위 0.1% 뭐 이런 정도였죠. 서울대에 가고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44살에 뒤늦게 수능을 보고 다시 의과 대학을 들어 간 겁니다. 그것도 용하긴 한데 내용을 보니까 처음부터 너무 잘 나셔 가지고, 별로 들을 게 없더라고요.


저는 공부도 그렇고 또 인턴에서 전공의 선택하는 과정도 그렇고 제 뜻대로 잘 되지 않았어요.


근데 뜻대로 되지 않은 게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태어나서 제일 오랫동안 원망해 본 사람이 전공의 탈락시켰던 과장님입니다. 그런데 제가 재활의학과 전공의가 딱 되고 난 다음에 그분한테 진짜로 감사했어요. 처음에는 성형외과 그다음에 신경과, 내과 이렇게 여러 군데 다 내봤단 말이에요.


근데 다 안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성형외과는 처음부터 어려운 과였는데 젊은 교수님이 일 잘하니까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난 진짜 잘하는 줄 알고 했더니 안 되더군요. 어쨌든 그때 내 뜻대로 안 되었습니다. 그 무렵 첫 째가 초등학교 갈 무렵이었습니다. 아이가 7살 될 때인데 갈 곳이 마땅히 없으니까 진짜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과장님을 되게 원망했었는데


제가 재활의학과 전공의가 되고 일을 시작한 지 딱 일주일 지나서 정말 떨어뜨려 주신 게 너무너무 감사한 거예요.


재활의학과 환자들은 대체로 뇌졸중이나 척추가 다쳐서 마비가 있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을 이렇게 보고 있는데 “내가 이 환자들하고 내가 평생 살 수 있다면 다른 중간에 어떤 조건이 바뀌더라도 나는 만족하겠다. 내가 평생 이런 분들을 보고 살 수 있다면 진짜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1년 차 때 첫 환자를 맡았는데 이분이 뇌출혈이 있어서 수술하신 분이었어요. 오른쪽이 다 마비가 되신 거죠. 왼쪽만 움직이고 오른쪽은 못 움직여요. 근데 재활의학과 전공의는 특성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만져보고 움직여보고 그렇게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환자 진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거의 한 시간 걸려요.


눈 뜨는 힘부터 시작해서 동공 반사며 냄새 맡는 것, 혓바닥 움직이는 것, 팔, 다리 근력도 검사해야 되고, 그다음에 감각 검사해야 되고


마지막에 항문 괄약근에 힘이 있는 것까지 다 검사해야 해요. 그거 다 하고 나면 한 시간 걸려요.


근데 1년 차가 뭘 잘하겠어요? 어설플 것 아닙니까?


선배들 하는 것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워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혼자서 하는데 뭘 잘하겠어요. 


근데 환자분도 그렇고 보호자도 그렇고 한 시간 동안 내가 이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체크하고 적고 이렇게 하니까 음료수를 주면서 너무 감사하다는 거예요. 나는 치료를 한 게 아니잖아요. 검사만 했을 뿐이거든요. 아무것도 별로 도움을 드린 게 없어요. 나는 체크만 한 것뿐인데 그분들이 너무 감사하다는 거예요.


“아니 나는 검사만 한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감사합니까? 아직 치료도 안 했습니다.”


보호자분이 말씀하시는데 환자분이 아프고 난 다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져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난 그것만 보고도 너무 감사했어요. 왜냐하면 그냥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그냥 만졌을 뿐이에요. 내가 가진 지식은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지식인데도 그분들이 그렇게 감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환자분이 너무 좋았어요.


의사는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논문을 보고 수련하면서 그렇게 공부해서 최소한 의사 면허증은 따죠. 면허증은 따지만 진짜 의사가 되는 것은 환자들이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렇게 어설픈 1년 차 의사한테 자기 몸을 완전히 그렇게 맡겨주지 않으면 의사는 의사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 환자를 보면서 마치 하늘로부터 면허를 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의사 면허증이야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기 이름으로 도장 찍어서 주는 것이지만


내가 하는 일을 알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그 종이 쪼가리 있다고 의사 생활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그냥 최소한의 자격일 뿐입니다. 


진짜 의사로 사는 것은 내가 이런 환자들 덕분에, 자기 몸을 나에게 맡겨준 환자들 덕분에 의사다운 의사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의사가 가장 고마워해야 하고, 스승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저는 환자라고 생각해요.


그런 환자들이 자기 몸을 맡겨줬기 때문에 지금까지 의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이런 어설픈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로 살고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왔고, 환자분들이 도와준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9cp1ZzTBvSE



다음에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성탄절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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