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을 같이 하는 분이 올려주신 흥미로운 주제가 있어서 함께 공유하려 합니다.
몸의 통증과 마음의 고통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발제하신 분은 마음의 상처라고 하셨는데 제가 마음의 고통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몸의 통증이 더 견디기 힘든가? 마음의 고통이 더 힘든가?
저의 대답은 “사람 따라 다르고, 상황 따라 다르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고 나중인지, 원인과 결과에 대해 확실하게 가를 수 없고 확률적으로 결정될 뿐입니다. 어떨 때 몸의 통증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고, 어떨 때는 마음의 고통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큰지 확인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에 따라 해결하려는 전략도 달라지고요.
통증과 고통의 문제는 생물학과 과학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의 영역이이도하고 때로는 영성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다 할 수는 없어서 책을 쓰고 있답니다. 몸과 마음, 통증과 고통... 어느 것도 칼로 두부 자르듯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확률적으로 결정될 뿐입니다. 결론을 내리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통증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풀어 가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몸의 통증은 의사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크고 의사가 치료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환자보다 더 해결하는 데는 선수니까요. 마음의 고통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몸의 통증을 해결할 때와는 달리 스스로가 해결의 주체가 되고 전문가의 도움을 참고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전문가라는 사람도 환자보다 조금 더 경험은 있겠지만 마음의 고통 뒤에 숨겨진 원리를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통증치료를 17년 하고 이번에 책을 쓰면서 감정에 관한 책을 10권, 뇌과학과 명상에 관련된 책을 20권 정도 읽고 참고했습니다. 논문 40편 정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답이다!”라고 느끼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것이 좀 더 상황에 잘 맞는 것 같다.”라고 느끼는 것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몸의 통증과 마음의 고통이 생각보다 그렇게 분명히 구분이 되질 않는다.
외상이나 조직의 염증이 있어서 통각신호가 몸에서 계속 올라오는 경우를 기질적 통증이라고 하며 조직의 손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증이 발생한 지 3주 이내인 급성기에는 분명히 몸의 통증에 해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3개월 이상 만성이 되면 거의 몸의 통증과 마음의 고통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에도 진통제를 쓰면 일부 호전이 되고 통증 환자에게 우울증 약을 써도 일부 호전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성통증이 3개월 이내 회복되면 대체로 마음의 고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거나 이어지더라도 강도가 낮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거나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하면 몸의 통증도 당연히 마음의 고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급성통증과 만성통증의 중간이 아급성 통증 단계(3주에서 3개월)인데 이때 좋은 의사를 만나 빨리 회복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답입니다.
2. 불안은 통증을 악화시킨다.
불안 성향이 높은 그룹은 낮은 그룹에 비해 같은 자극에도 통증의 강도를 훨씬 크게 느낍니다. 이 두 그룹 간의 통증의 역치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불안 성향이 낮은 사람이라도 상황을 설정하여 불안감을 높이면 통증을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 그래프는 몸의 통증과 마음의 통증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위해 그린 것입니다. 급성일수록 기질적 통증일 확률이 높고 기질적 통증(외상이나 염증 등)은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3개월 이내에 대부분 회복됩니다. 3개월 이상 지속되는 통증을 만성통증이라 합니다. 만성통증 환자 중 25% 정도가 통증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면, 우울, 불안, 피로 등 다양한 정신과적 문제를 동반하며 일상생활에서 기능이 떨어집니다. 이런 환자들을 만성통증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불안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더 많이 아프고 더 오랫동안 아픈 경향이 있습니다.
3. 세 번째 화살, 고통! 고통을 피하자!
스승이 제자에게 묻는다.
"만약 누군가의 화살에 맞으면 아프겠는가?"
제자가 대답한다.
"아픕니다."
스승이 다시 묻는다.
"만약 똑같은 자리에 두 번째 화살을 맞으면 더 아프겠는가?"
제자가 말한다.
"몹시 아픕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한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한 감정적 고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 경전인 아함경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두 번째 화살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입니다. 뜻하지 않은 상처와 이별과 재난은 특별한 일처럼 보이지만 살아있음에 대한 세금처럼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의 대부분은 실제의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 때문에 나타납니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고 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맞는 화살은 누군가 나를 향해 쏘아대는 첫 번째 화살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쏘는 두 번째 화살입니다.
통증을 가진 환자들과 늘 함께 살다 보니 첫 번째 화살은 감각 중 하나인 통각 nociception, 두 번째 화살은 통증 pain이라고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성통증 증후군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나는 세 번째 화살을 가슴에 꽂고 오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세 번째 화살의 이름은 고통 suffering입니다.
두 번째 화살인 통증도 없다면 좋겠지만 살면서 통증을 덜 느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전혀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반복되는 통증이 만성통증으로 이어지고 만성통증을 겪는 환자들 중 상당수는 불안, 우울, 불면, 피로,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두 번째 화살인 통증에 이어서 세 번째 화살인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수행이 잘 된 사람도 통증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 논의의 목표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지 두 번째 화살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피해야 하는 화살은 세 번째 화살입니다. 통증을 경험하지만 그것을 내 삶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논의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만성통증의 원인을 언제나 외부조건과 감각에 의한 것이라고 시선을 밖으로만 향하고 있다면 내 삶은 외부조건에 의해 언제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안녕을 위해 내 가슴에 내가 화살을 꽂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시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것은 때때로 가능하고, 세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바로 지금이라도 가능합니다.
4. 몸의 고통이 삶을 무너뜨릴 때는 무조건 치료해야 한다.
말기암 환자, 난치성 자가면역 질환 환자 등 통증으로 인해 자신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환자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통증 그 자체를 줄여주어야 합니다. 이 때는 약을 아끼면 안됩니다. 때로는 마약성 진통제도 쓰고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환자의 불안을 함께 케어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설령 급한 불을 껐다 하더라도 환자의 뇌리에 고통에 대한 예측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자칫하면 약물에 기대어 평생을 살아갈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통증치료와 함께 마음을 돌보는 일들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뇌는 통증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기관만이 아니라 언제나 적극적으로 상황을 예측하는 기계입니다. 뇌의 작동원리 자체가 이렇습니다. 이런 특별한 예측 기계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통증을 이해하고 통증을 잘 다루는 방법입니다.
5. 몸의 반응을 유도하는 숨겨진 주인공, 자율신경과 내수용 감각
몸의 반응을 촉발하는 것은 자율신경입니다. 자율신경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조절하는 신경이 아닙니다. 뇌의 기본모드인 예측에 비추어 주변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비교판단하여 생존에 가장 유리한 반응을 선택하는 것이 자율신경의 기능입니다. 면역계, 내분비계, 소화기계 등 여러 장기와 근육과 혈관 등 몸 전체가 이 상황을 생존에 가장 유리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불안은 이런 자율신경의 예측에 오류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늘 전쟁터에 사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심장은 빨리 뛰고 혈압은 높이고 근육에 긴장을 높입니다. 소화는 잘 안되고 잠도 잘 안 오고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죠. 이것은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흥분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자율신경의 지휘에 따라 온몸 구석구석 장기에서 올라오는 신호를 내수용 감각이라고 합니다. 내수용 감각에서 이상이 생기면 콕 찍어 말할 수는 없어도 뭔가 몸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때 느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낌은 언어로 표현하기가 애매합니다. 그렇지만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죠. 이 느낌을 바탕으로 기분, 감정이 발생합니다. 감정의 수준에 까지 올라와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통증의 공식적인 정의는 ‘조직의 손상과 연관된 불쾌한 감각이나 정서적 경험(감정)’입니다. 따라서 통증도 감정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심리적 고통도 육체적 고통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순수하게 육체적 통증이 없는 상황에서도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전질환의 하나인 선천성 무통각증 환자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통증수용체의 문제로 인해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해서 시장통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뜨거운 돌 위를 걸어가고 칼로 자기 팔을 찌르기도 합니다. 아프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 우울감을 느낍니다. 우울감이 통증인가라고 하면 문제가 좀 어려워지긴 합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통증이라는 감각이 없으니까요. 고통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 20세 이전에 죽습니다. 통증이 전혀 없는 삶이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통증은 우리를 지키는 수호천사니까요.
통증에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는 우리 집 강아지에게서 배웁니다. 그렇게 저를 졸졸 따라다니다가도 제가 무심코 꼬리를 살짝이라도 밟으면 깨갱하고 피하거나 잠시 으르렁 거립니다. 10분만 지나면 다시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제 옆에 와서 몸을 비빕니다. 나도 그 녀석의 꼬리를 밟지 않게 더 조심하게 되죠. 통증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딱 그만큼만 느끼고 10분 이상 마음에 품지 않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는 통증에도 딱 그만큼만 느낄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사피엔스의 뇌는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측을 하는 기계니까요. 그래서 그 예측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고 삶의 순간순간에 진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부디 통증의 실체를 이해하고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삶을 만끽하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