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사의 환자일기, 두 번째 이야기
저의 이 지구별 소풍을 아름답게 해 준 두 번째 환자분입니다. 처음부터 쉽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참으로 난해한 케이스였습니다. 저는 이 분을 보면서 저와는 너무도 다른 반대편의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조용한 울림이 있습니다. 군자가 64괘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나하나씩 그 괘의 특성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과정이 주역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군자의 이야기처럼 저도 64괘를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년 여름 수개월 동안 만성통증과 자율신경실조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셔서 수액으로 겨우 연명하던 50대 여자분을 치료한 적이 있다. 약 3개월간 입으로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 상태여서 체중이 줄고 불안과 공황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환자 본인이 힘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온 가족이 다 같이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남편분은 사업을 하시는데 워낙 성품이 부드러워서 아내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바깥일을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고 아내의 병수발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언니도 참 따뜻하고 지혜로운 분이었는데 대구로 직접 내려와서 동생의 병간호도 하고 병원을 데리고 다녔다. 대학병원도 가고 온갖 병원을 가서 내시경과 컴퓨터 촬영을 포함한 다양한 검사를 해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결국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항불안제 등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계셨다. 그렇지만 입으로 삼키지 못하는 증세는 전혀 좋아지지 않아서 동네 정형외과 병원에 입원하여 주사를 맞고 수액을 통해 겨우 연명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환자 본인이 거부하는 상태여서 치료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첫 면담에서 거의 한 시간을 썼다. 이 분의 말을 끊으면 그 마음도 닫히고 의사와의 심리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계속 더 얘기하시도록 추임새를 넣었다. 마치 묵은 변을 쏟아 놓듯 그간의 힘겨웠던 순간들을 토해 놓으셨다. 간호팀에서 두 어번 신호를 보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환자를 한 명 더 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다. 어쩌면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는 순간이다.
물론, 이런 버거운 환자를 맡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마음 같아서는 큰 대학병원에 의뢰서를 써주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편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대학병원도 다녀왔고 서울에 있는 언니가 서울에서 어떤 의사 선생님이 저를 찾아가 보라고 추천하셨다는데 내가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환자를 맞닥뜨릴 때 늘 주문처럼 외는 말이 있다.
이때를 위해 내가 준비되었다!
그간 보아 왔던 논문과 석학들의 지식, 수만 명의 환자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많은 경험들은 모두 이때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가!
나 개인의 안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 나에게 주는 또 하나의 숙제라고도 할 수 있고 하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지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때론 진료실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만 보고도 어디를 치료해야 할지 퍼뜩 감이 오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처럼 진흙탕에 들어가 그 진흙을 묻혀가며 험한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환자를 끄집어내야 하는 때가 있다. 이때가 바로 그때다.
자율신경 실조에 대해 자세히 설명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치료하자고 말씀드렸는데 서너 번 치료 후에 조금 좋아져서 죽을 먹기 시작하더니 병원에 오는 횟수가 일주일에 한 번, 두 주일에 한 번으로 들쑥날쑥해졌다.
한 달 반 정도 치료 후에는 계란 오믈렛에 밥도 드시고 감자도 드시기 시작했는데 공황 증세가 이따금씩 찾아와서 더 이상 치료가 꾸준히 이어지질 못했다. 이 분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 병원 식당 여사님이 일부러 부드러운 반찬을 만든다고 오믈렛에 햄을 작게 썰어서 밥에다 얹어 주셨다. 간호팀 한 사람이 전담해서 옷 갈아입는 것부터 일거수일투족을 다 따라다니면서 챙겼다. 의사뿐 아니라 수많은 병원 식구들이 이 분의 쾌유를 위해 정성을 쏟았다.
가을 즈음에 한 달간 우리 병원에 오지 못하시길래 여러 번 전화를 드렸다. 본인과 두어 차례, 남편분과도 두어 차례 통화를 했다. 한 번 통화를 하면 30분은 예사로 지나간다. 그래도 내가 그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면 본인도 본인이지만 남편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죽겠다는 말을 하고 유서도 여러 번 쓰셔서 온 가족들이 조마조마했었는데 마지막 통화에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요. 조금씩 노력해 볼게요.
그렇게 마지막 통화를 한 지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치료가 깔끔하게 끝나질 않아서 마음 한구석에 짐이 되었다.
그런데 올봄에 두 부부가 함께 찾아오셨다.
함박웃음과 함께 위스키 한 병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다.
얼마 전 출간한 제 책도 사들고 진료실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ㅎㅎ
진료실에서 진료는 안 하고 우린 이산가족 상봉한 것처럼 서로 붙잡고 한참을 웃었다.
아직 100%는 아니지만 뉴케어도 거의 끊고 체중도 7kg 늘었다고 하시니 이제야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누가 들고 있으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6개월간 짐을 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 당시 여러모로 힘든 일들이 많았는데 이 분의 함박웃음이 나의 고통을 덜어주셨다.
최근에도 힘겨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이 글을 정리하면서 새힘을 얻는다.
아래는 작년에 이분을 진료하며 썼던 글 중 일부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고통이 없기를…
내가 만나는 모든 생명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꼬옥 안아주기를…
매 순간 즐거울 수는 없어도
매 순간 내 속에서 올라오는 저항을 알아차리길…
그 저항 역시 기억에 사로잡힌 피해자임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하루하루 버거웠던 순간을 이 분의 웃음이 치유해 주었다.
때론 이렇게 의사도 환자에게서 치유를 얻는다.
마음 깊이 감사가 밀려왔다.
"감사합니다.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살 것 같습니다..."
의료현실은 그때 나 지금이나 여전히 엄혹한 계절이지만
삶은 언제나 이대로 진실이며,
아름다운 지구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