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사의 환자일기 시리즈
나의 지구별 소풍을 더 아름답게 해 준 환자들과의 이야기
나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 환자분들을 통해 나는 내 인식 너머에 대한 감각이 조금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일들을 내가 계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과정은 내 계획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가 좌우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 존재를 가장 평범하게는 運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종교적 배경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마음이라거나 우주법계라고 할 수도 있겠죠. 고대 동양사상에서는 이것을 天命천명 또는 道도 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존재를 自然(자연:그대로 그런 것)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때로 감성에 젖을 때는 이 존재를 삶 또는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어쨌거나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결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뿐입니다. 나는 그저 이 소풍길에 만난 인연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그 인연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것만이 나의 일입니다. (모든 대화내용은 환자분의 동의를 얻어서 싣습니다.)
5년 전 쯤 이 환자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서울 말투에 키가 크고 눈이 커서 약간 겁이 많을 것 같은 느낌 정도...
말이 조금 빨라서 말을 놓치지 않으려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작년 가을 환자분이 서울에 있다가 치료를 받으러 대구로 오셨다.
고관절통증이 있는데 서울에서 신경차단술도 받고 프롤로주사도 맞았는데 잘 치료가 안 되어서 오신 것이다.
자세히 진찰해 보니 고관절 자체는 문제가 없고 허벅지 앞으로 내려오는 대퇴직근의 힘줄의 염증 때문에 뜨끔뜨끔한 통증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통증이 아무리 심해도 두 세 번 정도 정확한 부위에 프롤로주사를 하고 나면 걷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날도 대퇴직근의 압통점을 찾아서 치료했더니 즉시 증상이 절반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면 두 세번 정도만 해도 크게 어렵지 않게 회복될 것으로 보았다.
환자분도 귀가하면서 훨씬 편하다고 하면서 표정이 밝아지셔서 나도 안심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치료과정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선택하는 두 가지 갈림길
며칠 뒤 다시 증상이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몇 차례 반복해서 치료했는데도 일시적으로는 좋아지는데 치료효과가 유지되지를 않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서 장요근과 신경이 압박을 받을 만한 다른 부위를 몇 군데 더 치료를 했는데도 호전된 상태가 유지되지 않고 자꾸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20년 내 치료 경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 의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째는 더 강력한 치료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력한 스테로이드 주사를 쓴다든가,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싼 시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밀하게 MRI를 촬영해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안되면 MRI에서 확인된 이상한 부분이 문제라고 판단해서 수술을 할 수도 있다.
둘 째는 자신의 진단을 의심해 보는 것이다. 나의 진료 경험상 이 환자는 90% 이상 확률로 대퇴직근 힘줄염이 맞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제2, 제3의 후보가 되는 부위까지 다 치료를 했는데도 증상이 반복된다면? 그래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무언가 다른 게 있다!!!
고통받는 분들의 회복과정이 내 진료경험에 어긋날 때 나는 십중팔구는 두번째 선택지를 고른다.
분명히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치료한 지 약 한 달 째 되던 어느 날 주사를 하기 전에 면담을 했다. 내 진료를 도와주는 선생님과 간호사들을 진료실에서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서는 환자분의 눈을 바라 보았다. 그 큰 눈에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그것은 통증 때문에 나타난 슬픔은 아니었다. 불안과 슬픔이 뒤범벅된 그 큰 눈을 보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지금 이렇게 회복이 잘 되지 않는데는 제가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알려주세요.
슬픔으로 가득찬 그 큰 눈이 잠시 더 커졌다.
그리곤 이내 가득차 있던 그것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숙인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 그것이 계속 흘러내렸다.
환자분의 마음으로 로그인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진료실에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 먹먹한 시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치료를 하는 사람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서로 둘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내가 그 환자분의 마음에 로그인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몇 마디 말을 더 하긴 했지만 환자는 우느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날 나는 특별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이 프롤로 주사를 하고 도수치료는 받지 못하고 치료가 끝났다.
내가 모르고 있는 그것, 환자가 말하지 않는 그것... 그것은 뭘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일요일 새벽, 서울에 학회 참석차 올라가고 있는 기차안이었다. 환자분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OOO님) (환자분은 OOO님으로 표시하기로 하자)
안녕하세요. 먼저 이렇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진료실에서 말씀 못 드린 이야기라 심장이 두근거려서 몇 번을 썼다 지웠다 수십 번 고민했는데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여건 되실 때 한 번만 메시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락을 구해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곤란하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
나)
"괜찮습니다. 지금 서울 학회가는 열차 안이라 메시지로 가능합니다."
OOO님)
"아..그러시군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이러려고 원장님 팔로우한 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