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감정의 뿌리에 대한 고찰
인간의 고통에는 불가피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죽음이 가장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죠.
고통의 뿌리에는 공포가 있고 그 공포의 앞면만 보고 외면하거나 달아나지 말고 그 뒷면을 살펴보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공포의 속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포의 본질을 마주치는 그 지점이 바로 불안과 우울, 통증에서 벗어나는 디딤돌을 딛는 순간입니다. 이 디딤돌이 없다면 고통을 딛고 평화로운 순간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 공포의 뒷면에는 '첫째, 원하는 것이 너무 많다.', '둘째, 정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라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외에도 공포의 뒷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코칭하고 있는 분들은 겉으로 봐서는 사람도 괜찮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코칭 첫 시간에 그들의 목표를 물어보면 거의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얼마나 이상적인 목표인가요?
그러나 실제 그들이 쓰고 있는 시간과 돈을 보면 이 목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 편,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싶다는 말은 꿈이지 목표가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돈은 trade off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달성되기 어렵다는 뜻이죠.
돈을 원하면 시간과 함께 의식적 에너지를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것도 상당한 기간을 말이죠.
막연하게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일정 수익이 꼬박꼬박 나오는 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현금흐름이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갖고 싶다는 것이죠. 건물주라든지 상당한 자산가라든지, 잘 되는 매장을 운영한다든지 하는 것은 시간과 함께 엄청난 의식적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만 꿈만 꾸는 사람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입니다. (물론, 부모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예외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삶을 목표로 할 수는 없죠. 그건 다음 세상을 목표로... ㅎㅎ)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돈과 감정의 에너지를 잘 탐구하고 활용한다면 그런 삶이 꿈으로 끝나지 않고 목표가 되고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로부터 그렇게 물려받지 않았더라도 자식들에게는 이런 지혜를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의 큰 문제는 행복한 가정을 다른 성취만큼이나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관계라 하더라도, 아무리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나를 제외하면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예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습관이라도 하나를 바꿀라 치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도 패전이 예견되어 있는 전쟁을 말이죠... 잘해야 휴전이죠. 완전한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보면 그도 다른 사람을 바꾸거나 이해하려고 상당히 노력을 했나 봅니다.
지옥과 함께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헛된 꿈인가요?
이것은 복잡계의 성질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복잡계란 여러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말합니다. 비록 선형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물체도 세 개만 되면 계산이 매우 어려워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비선형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요소들이라면 두 개만 있어도 매우 매우 예측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족관계는 여러 사람이 얽혀 있어서 기본적으로 복잡계에 속합니다.
나와의 소통조차 일반해가 없는 삼체문제
가만히 내면을 살펴보면 나 자신도 원하는 것이 여러 개여서 나 스스로도 복잡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소통이라는 책에서는 내 속에 있는 다양한 자아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경험자아, 기억자아, 배경자아 이렇게 세 가지의 자아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자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나 자신 안에도 세 개의 자아가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나 혼자 있어도 세 개의 자아가 서로의 작동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삼체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삼체문제란 기본적으로는 일반해가 없는, 다른 말로 하자면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복잡계와 복잡계가 만나서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더구나 가정생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취하고 있는 다양한 목표가 뒤얽혀 있다면 이것은 제 아무리 아인슈타인 할아버지가 와도 제대로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삼체문제에서 매 경우마다 정답을 찾는 것은 푸앵카레 같은 천재적인 수학자도 포기한 것입니다. 높은 성취를 원하면서 평화로운 인간관계, 가정생활도 원하는 것은 일반적인 접근으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가능한 적절한 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바로 특수한 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공포반응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도움이 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