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면 살고 싶고,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1)
프롤로그 1 : 고통, 그 낯선 느낌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피하려는 마음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의 구렁텅이로 우릴 몰아넣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고통을 정확히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는 고통에 빠진 분들과 20여 년간 함께 살아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을 보는 것이 저에게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그 고통 속에 빠진 환자분들에게 통증을 줄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 고통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 몸과 마음, 생각과 감정, 자율신경과 의식, 그리고 의식 너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환자분들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이 낯선 여정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환자들과 함께 한 실제 이야기와 고통을 지나가는 다양한 연습을 담은 ’ 회복의 안내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몸이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죠. 어쩌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아하! 그것!'이라고 할 만한 말이죠.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하려면 상당히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황에 따른 즉흥적인 반응을 따르는 것을 '마음'대로 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의도와 일치하는 것을 두고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공부를 하는 분들은 '즉흥적인 반응'이나 '자신의 의도'를 탐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이란 말을 이렇게 '마음'대로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게 쓰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마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공부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마음'의 쓰임새가 다양하기에 혼란이 많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조차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는 경우를 매일 현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사연들을 매일 접하면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린 분들에게 그 '마음'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아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쓰는 글이 고리타분한 학술서나 이론서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고통 속에 빠진 암환자들, 자율신경실조증 환자들, 만성통증 환자들이 머리 아프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쉽게 써서 그분들의 마음에 가닿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지혜와 언어의 한계가 뚜렷하여 애쓴 만큼 여러분께 가닿을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말로 하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이 본바탕의 자리에 대해 말로 하는 것은 허물을 하나 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부족한 사람에게 허물이 하나 더하여진다 해도 환자 한 사람이라도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20년 간 고통에 빠진 환자들과 함께 살아온 저의 경험과 만성통증환자들을 위한 심리학, 뇌과학, 종교적 전통, 영성이 가득한 통찰을 담은 책들, 감정과 수면에 관한 책들, 논문들을 읽고 환자들에게 적용해 왔던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저 나름대로의 체계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이론서로서의 틀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그저 고통받는 분들의 마음에 가닿는 것이 가장 목표인지라 그 목적에 가장 충실하게 써보려 합니다.
너무도 많은 내 마음, 내 마음 대체 뭘까?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라며 시작하는 노래가사처럼 우린 누구나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저는 정말 내가 이중, 삼중 인격자인 걸까?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때의 나를 '자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심리학에서는 이 자아를 여러 갈래, 여러 층위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저는 '자아'라는 말 대신 '마음'이라는 말로 고통받는 여러분의 '마음'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합니다. ‘자아’라는 단어가 주는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딱딱한 느낌을 피하고 좀 더 생생한 느낌이 있는 말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또한 ‘마음’이 주는 편안한 느낌 뒤에 굉장히 모호한 영역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고통의 실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간단하게 마음을 세 가지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마음의 세 가지 분류는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인 장기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생명을 대표하는 장기는 심장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심장이 가장 역동적인 장기이며 멎으면 사람이 죽으니 가장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뇌과학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현대에 들어서는 그 사람의 본질을 대표하는 장기를 뇌라고 보는 관점이 더 우세해졌습니다. 뇌가 그 사람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는 뇌를 생명의 본질로 보는 관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오래된 관점은 어느 문명사회에서나 비슷한 정도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생명의 본질에 다가서는데 중요한 통찰을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마음 중 첫 번째를 몸과 연결된 마음, 두 번째를 정신과 연결된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세 번째는 개별적인 의식 그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 마음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마음은 지극히 개별적인 마음입니다. 세상의 인구수와 똑같은 숫자만큼의 첫 번째, 두 번째 마음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마음은 개개인마다 개별적인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공통분모와 같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사피엔스라는 하나의 種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인류의식인 셈이죠. 그에 비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마음은 개인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연결된 너무도 뻔한 '마음'과 언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너무도 모호한 '마음'이 뒤섞인 상태에서 제 멋대로 치달리는 두 번째 마음. 이 두 번째 마음의 방황 속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처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아닐까요?
다음 시간에는 몸이 아프면 살고 싶고,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