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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 살고 싶은 마음

1부. 몸과 마음, 따로 또 같이 (1)

by 김정훈

"몸이 아프면 살고 싶고,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


1부. 몸과 마음, 따로 또 같이


1장. (1) 살고 싶은 마음



살고 싶은 마음 - 흙의 아들, 마지막 소원



병원 복도 끝, 창가에 선 여든이 다 된 농부. 앙상한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것은 회색빛 도시의 풍경뿐이지만, 그의 눈은 이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안강의 들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80년 가까운 세월, 흙과 함께 살아온 그의 삶은 이제 병상 위에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대장암 4기, 이미 간과 폐까지 암세포가 퍼진 상태. 평생 병원 한번 가지 않고 묵묵히 밭을 갈던 우직한 농부에게 닥친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저는 의사로서의 무력감을 먼저 느꼈습니다. 손쓰기 어려울 만큼 진행된 병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 심각한 욕창과 영양실조. 그의 모습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바싹 마른 땅과 같았습니다. 말수도 거의 없으셨고,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황소고집이라 병원 가자고 해도 절대 안 들으셨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대장암이 터져 복막염으로 응급수술을 받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대신 밭만 돌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안에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욕창을 치료하고 고주파 치료, 면역치료를 하면서 그의 몸은 놀라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병원 복도를 스스로 걷게 되었습니다. 군인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 그의 뒷모습에서 저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몸이 좋아지면 뭘 하고 싶으세요?" 제 물음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고향에 가야지. 농사는 못 지어도, 밭이 잘 있나 봐야 해."



그의 소원은 소박했습니다. 평생을 바친 땅, 그 땅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그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농부를 위해 작은 파티를 열었습니다. 삼일절 연휴, 병원 꼭대기 층에서 열린 작은 파티. 그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다른 환자들과 어울렸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도 말기암 환자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이자 농부였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해진 어느 날, 우리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아들과 딸과 함께 안강 들녘으로의 외출.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의 마지막 소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외출을 며칠 앞둔 수요일 밤, 그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숨이 가빠지고,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졌습니다. 새벽 4시, 저는 안강농부를 응급실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 난 여기가 좋은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응급실로 가는 것을 마지막까지 마다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내내 그는 온 힘을 다해 숨을 쉬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붙잡으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그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경북 일대를 집어삼킬 듯 번지던 산불처럼, 그의 온몸에 퍼져나갔던 암세포는 그의 마지막 숨과 함께 잦아들었습니다.



그가 지구별 소풍을 마치고 먼 길을 떠나던 날,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습니다. 그와 함께 한 저의 마지막 여정은 비록 50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안강농부를 응급실로 모신 뒤에 응급실 앞에서 새벽공기를 크게 들이 쉬었습니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 콧속으로 시원스레 들어오는 공기 한 줌도 당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숨을 쉬며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저 평생을 함께 한 자신의 땅을 다시 한번 보는 것. 그 소박한 소망 속에 담긴 삶에 대한 절실함은, 몸의 기능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삶이란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처럼 말기암 환자들은 육체적 고통이 극심하지만 마지막까지 생명을 붙들고자 하는 깊은 의지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모든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요?


이 때는 몸과 마음이 하나입니다.


안강농부의 힘겨운 마지막 호흡을 보며 '몸의 고통이 반드시 죽음을 불러오지는 않는다'는 엄숙한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죽고 싶은 마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골농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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