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3)
가난하지만 한 번도 무언가를 포기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넉넉했고 만족했습니다.
내 개념에는 없는 형형색색
좌충우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세 번째 이야기 "가난한 결혼"
가난한 결혼
기민이 형과의 생활은 날마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기민이 형을 만나기 전에는 퇴근시간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시커먼 총각 3명이 있는 조그만 자취방에 일찍 들어간들 뭐하겠는가? 일 욕심도 있어서 밤늦게 남아서라도 최대한 보고서를 꼼꼼이 쓰고 거래처를 챙기는 등 정신없이 일했다.
기민이형을 만난 뒤 나는 최대한 일을 집중해서 퇴근시간 전에 끝내려고 노력했다. 퇴근하면 곧장 그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볼 때 나는 이것저것 고쳐야 할 게 많은데 그는 언제나 내가 온전하고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능력 있고 잘 나가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사람과 사람이 존재로 만나고 행복을 가꾸어가는 데는 아무런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마음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
1995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당시 경희대 후문 근처의 이문동 비탈길에 있는 빌라에는 나중에 내 신혼살림집의 집주인이 될 형규 형님이 살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올라 오신 경룡이 형님이 동국대 한의대 본과 과정을 위해 얼마간 머무르고 계셨다. 언제나 넉넉하고 풍성한 인격을 가진 경룡이 형님 주위에는 나와 지금의 아내가 된 그녀를 포함해서 젊은 형제, 자매들이 몰려들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면서 그의 삶의 진액을 함께 나눠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혼이야기가 나와서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된 지 몇 달 채 지나지 않은 1995년 가을에 양가 부모님을 만나고 결혼 승락을 얻게 된다. 이 때 아내는 결혼승낙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빚 밖에 없던 내게 처녀시절 월급을 모아 놓은 전재산 천 몇 백만원이 담긴 통장을 내게 맡기면서 자신을 내게 맡겼다. 내가 받아든 것은 통장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였다. 얼마나 행복한 부담이었는지 ... 평생 이 사람을 내가 책임져야 하겠구나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다만 우리 부모님들은 결혼하지 않은 형들이 있으니 식은 좀 미루면 어떻겠냐고 해서 나는 두 형들에게 1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빨리 짝을 찾아서 결혼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큰 형은 결혼을 이듬 해 가을 까지 하질 못했고 나는 막내이면서도 가장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96년도 가을 즈음 결혼을 하고 형규 형의 빌라 윗층 다락방에 전세 보증금 천만원 짜리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 때까지 그 다락방에는 몇 명의 지방에서 온 교회 자매들이 함께 살았는데 이런 저런 문제로 하나 둘씩 자진해산 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형규 형의 부인 선희누나는 초등학교도 채 들어가기 전의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하룻저녁에도 열 댓명씩 찾아오는 북적거리는 젊은 친구들과 그 친구의 친구들에게 그리 크지 않은 그 빌라를 거의 사랑방처럼 내주다시피 했다. 화려한 상차림은 아니지만 언제든 푸짐하게 먹여서 보내고 늦으면 재워서 보내고 처음 오는 사람에게도 늘 봤던 사람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물론 주인장인 형규 형의 큰 배포가 아니면 그럴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선희 누나였기에 그 시절 선희 누나의 헌신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그 따뜻함이 없었다면 갈 곳 없던 젊은 청년들은 마음을 내려 놓고 쉬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 그 집 밥을 먹은 젊은 처녀 총각들이 지금은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들이 몇 씩 딸려 있으니 이문동 형규형네 집은 마치 커다란 부화장 같았다. 계란이나 마찬가지인 어린 사람들을 보듬어 알을 깨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게 한,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부부이다. 지금 돌아봐도 나는 작심하고 그렇게 살려고 해도 못할 것이다. 정말 깊이 깊이 선희 누나와 형규 형에게 감사를 다시 드리고 싶다.
그런데 형규형은 너무도 솔직한 사람이어서 싫으면 그 자리에서 싫다고 한다. 얼굴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꾸미는 것을 체질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어려서 부터 그리 다른 사람들에게 싫다 소리를 듣지 않고 커서 그런지 그런 형규 형이 너무 편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면 알아서 숨고 기분이 좋아 보이면 같이 나와서 수다를 떨고 같이 운동도 하면서 노니까 부딪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놀러 오는 다른 젊은 친구들이야 그 사정을 잘 모르니 자다가 쫓겨 나기도 하고, 버릇없다고 된통 혼나고 도망가기도 하고, 언성이 높아지며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짐을 싸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형규형 눈 밖에 나지 않은 최후의 2인이 나와 아내, 우리 두 사람이었다.
우린 어차피 돈도 없고 형규형이 우리를 좋아해 주어서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기로 했다. 어차피 다락방이어서 허리를 다 펼 수도 없었으니 가구가 필요가 없었다. 침대에 작은 앉은뱅이 책상 겸 식탁, 키낮은 책꽃이 몇 개, 2인 용 그릇들 몇 개가 신혼살림의 전부였다. 다락방 한 칸이어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뻐꾸기 시계 사건이 터진다. 결혼 선물로 들어온 뻐꾸기 시계가 있었는데 우리 다락방에서 뻐꾸기 시계가 울리면 형규형이 시끄럽다고 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랫층 형규 형네 집에도 뻐꾸기 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형님이 좀 기분이 안좋은 날이면 강도 높게 우리집 뻐꾸기를 매몰차게 몰아 부치면서 야단을 치는 통에 하루는 아내가 억울해서 울면서 한 마디 했다.
"왜 아래 층 뻐꾸기는 울어도 되고 우리집 뻐꾸기는 울면 안되요?"
그 길로 형규형과 아내의 사이는 소원해 졌다.(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웃고 지나가는 일이 되었지만...) 내 생각에도 형규형네 강아지가 우리가 출근한 틈을 타 우리 침대에 올라와서 이불에도 응가를 해놓고 가는 일이 자주 있던 터라 더 이상은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따로 방을 얻어 나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형규형네 다락방 생활도 끝나고 12평 짜리 원룸을 얻었다. 더 이상 뻐꾸기도 없고 강아지 똥도 없는 완전 천국같은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차가 없어서 양재동에 있는 교회에 갈 때는 치헌이 형의 차를 타고 자주 갔는데 르망에 2000cc 엔진을 얹고 개조를 했다. 굉음을 내며 스피드를 즐기던 형님의 차는 거의 롤러코스터 같았다. 직선구간에서는 출력이 큰 차를 따라 잡는 게 만만치 않으니까 곡선구간에서 스피드를 줄이지 않고 몰아서 앞차를 따라잡곤 했다. 커브를 돌면 온몸이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만 같았는데, 처음 치헌이 형이 모는 차를 탄 어떤 교회 형님은 오줌을 싸기도 했다고 들었다.
치헌이 형은 마약으로 몇 번 감옥을 드나들었는데 그 때는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람 하나는 참 좋았다. 부인인 홍미 누나는 처음 교회오던 날 입술부터 옷이며 스타킹이며 신발까지 모두 새빨간 all red 패션이었는데 색깔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의 사람들을 여기서는 드물지 않게 만난다. 문화적 충격은 내 선입견일 뿐이고 역시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판단하면 안되는 법이다. 교회안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나는 내 선입견이 얼마나 얄팍하면서도 쓸모 없는 것인지 종종 경험하고 곧 내려놓게 된다. 홍미 누나는 순전히 치헌이 형 한 사람을 보고 생판 낯선 교회로 왔다.
당시 서울교회는 석연이 형이 운영하는 조그만 가내공장 한 구석을 교회로 쓰고 있었고 늘 조그만 아이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보잘 것 없는 곳이었는데도 교회생활 하면서 구김하나 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 지내서 참 보기가 좋았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치헌이 형은 대구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젊은이들 사이에 패션아이콘으로 떠올랐고 어떻게 마약을 끊게 되었냐는 주위의 물음에 "마약보다 더한 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 듣고 교회 형제들 만나기 바빠서 마약할 시간도, 생각도 없다"고 대답한다.^^)
그 해 겨울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민이 형이 LG에서 명예퇴직을 하게 되셨다. 겉으로 얘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꽤 일을 잘하시는 것 같았는데 실상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회사에서 명퇴를 하고 형님은 그렇게 좋아하는 대구에 있는 목사님 곁으로 간다고 살짝 들떠 있었다. 회사에서 잘리고 그렇게 설레어 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다. 대학생 시절 목사님을 만났지만 군대생활과 직장생활로 대구에 살 기회가 없어서 주말에나 가끔씩 대구에 가서 목사님을 뵈었는데 이제는 목사님 집 옆에 방을 얻어서 매일 가서 볼 수 있다고 벌써부터 기분이 들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망하게도 형님은 그렇게 대구로 내려가셨고 나는 신혼생활이 즐겁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열심히는 살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대구로 내려가고 싶다고 고백했고 아내는 방법을 찾아 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 때가 하필이면 IMF 직전... 대구에 청구나 우방같은 쓸만한 회사에 다니는 선배님들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하나같이 손사래를 치며 "여기 오면 안된다. 심각하다."고 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