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울에서의 미생 이야기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1)

by 김정훈

서울에서의 첫 직장 생활...

지금은 꽤나 번화가처럼 바뀐 건대입구

화양시장 뒷골목에서 대학친구랑

함께 자취하며 꿈을 키워가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1)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첫 번째 이야기 "서울에서의 미생 이야기"
서울에서의 未生 이야기


나는 1994년도 경북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선경(SK 그룹의 전신) 종합상사에 입사했다.

1-1.png

1993년도는 우리나라 경제가 활황기여서 대학 4학년 여름 방학 쯤 되면 여러 군데 입사원서를 내고 몇 군데 합격하면 그 중 마음에 드는 회사를 골라 갈 수 있는 시기였다.


나도 증권회사, 섬유회사, 무역회사에 합격했는데 서울에서 근무하는 선경종합상사를 선택했다. 월급은 증권회사가 훨씬 많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돈보다는 기회가 많은 쪽을 선택하고 싶었고 그 선택은 아주 훌륭했다.


무역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고 대구를 떠나 더 큰 곳에서 생활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나는 공장을 해외에 짓고 기계를 수출하고 마케팅까지 원스톱으로 해주는 플랜트 사업, 선박중계무역, 중화학사업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나는 그 일을 정말 좋아했다.


선경 그룹의 혁신적 경영철학인 SUPEX(Super Excellent-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목표를 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실행하는 방법)라는 개념이 내게는 무척 신선한 의미로 다가왔다.


상식보다 월등히 높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목표를 떠올리는 것은 의사가 된 지금도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신입사원 시절 SUPEX 수기 공모에서 사장님께 상을 받아 상금으로 사업부 전직원에게 로또를 사서 돌리며 기분을 내기도 했다.

1-2.png

우리 플랜트 사업부는 한 층을 통째로 썼는데 어림잡아도 삼~사백평은 족히 넘을 것이다. 신입사원 시절에 같은 사업부의 친구들은 대개 9시가 되기 조금 전에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나는 대체로 7시 30분 정도에 출근하는 때가 많았다. 당시 회사에서 보고서 때문에 가끔 밤을 새기도 했는데 우리 사무실 출근순서는 본부장인 상무님과 비서가 7시 전후 출근, 내가 7시 반쯤, 그 다음은 대개 직급 순서대로 부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신입사원들 순서였다.


그래서 가끔 7시 반부터 8시 까지 그 큰 사무실에 나와 상무님, 비서밖에 없던 적이 있었다.


상무님은 이따금 나를 불러 차를 마시며 회사생활에 관한 이런 저런 조언을 들려주시곤 했다.

1-3.png

그분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70년대 우리나라에 산업화가 일어나고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정신없이 세계를 향해 달릴 때 맨 앞줄에서 뛰셨던 분이다.


70년대는 그룹의 핵심산업인 섬유산업으로 경공업 분야를, 80년대는 중화학 산업으로 나라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산업역군이셨고 스스로 우리나라 산업화의 한가운데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큰 아파트에 기사가 딸린 자가용,

자제분들도 잘 자란 것 같고...

회사에서도 모두에게 인정받는 분.

무엇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사람.


대학 동기들과 건대입구역 시장통 뒷골목에 콧구멍만한 월세방에서 살던 내가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번은 여쭤 봤다.


"상무님은 정말 행복하시겠군요."


그러자 그 분은 금방 대답을 하지 않고 창밖을 한참 보다가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1-4.png

"열심히는 살았지만 잘 모르겠어. 다시 한 번 산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 같아."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룹 오너의 일가와 관계가 있거나 정치권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사장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다면 상무님은 일개 직원으로 입사해서 거의 정상까지 올라간 셈이다. 그런 분이 자신이 최선을 다해 달려온 길에 대해 허무한 듯 내뱉는 말이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내가 저분보다 더 열심히 해서 더 훌륭한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상무님은 사업을 추진할 때나 회의를 주재하실 때 보면 정말 명석하고 철저하셨다. 눈매는 매서워도 인간적으로는 따뜻한 분이셨다.


내가 20~30년 최선을 다한 뒤 도달하는 최선의 모습이 저 모습 일텐데 그 때 나도 저 상무님과 같은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지만 일 자체는 재미있었고 주말이면 언젠가 MBA 과정을 밟아 보겠다는 생각으로 동네에 있는 건국대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공부를 하며 시간이 흐르다가 1994년 말 운명적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1-5.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