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2)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는 것을...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입니다.
당시는 그냥 좋았죠.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사람의 향기...
그는 당시에 부산에서 일하다가
서울 LG화학 본사로 발령이 나서
상경했습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인은 정신병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낳은 아들은
청소년기를 방황하며 술을 먹고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릴 정도로 그에게는 버거운
존재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청년이 되었지만)
그렇게 재산이 넉넉한 편도 아니어서
서울로 올라와서도 교회 동생의 집에서
작은 방을 얻어서 더부살이를 했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능력도 없어 보이는 그에게
서울교회 식구들은 매일 밤이면
찾아 와서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는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나는 직장에서의 일과가 끝나면
그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서 퇴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서울교회 건물이 따로 없어서
영등포역 부근 널찍한 싸구려 여관방을
찾아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서
모일 만한 장소를 알아보곤 했습니다.
열명이나 스무명 쯤이 모여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 놓고...
그리곤 대중교통이 끊어지기 전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모두들 돌아간 뒤에 그와 나... 그리고
몇몇 총각 녀석들이 그 넓은 여관방에
덩그러니 누워서 못다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다가 잠이 들었죠.
지금 돌아보니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의 사정.
지지리도 복이 없는 그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마치 광부가 수 많은 돌덩이들 속에서
작은 금을 캐내듯 그렇게 캐고 또 캐고...
그는 금을 감싸고 있던 시커먼 돌덩이들은
돌아보지 않고
몇 톨 되지 않는 금조각을
소중하게 말해내는,
자신이 젊은 시절 만나서 30년 간
믿고 따랐던 목사님과의 삶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던 금조각이었죠.
박기민 이라는 사람은 내게
그렇게 진한 향기로 다가왔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
오랜기간 고민해 왔던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직장문제, 이성문제, 장래에 대한 걱정...
모든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는 다만 나를 내려놓고
함께 살 사람...
사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 돌아보니
혼자서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은
먹고 사는 것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하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행복!
나는 그것을 원했는데...
그것은 내가 고민하고 노력한다고
다다를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행복은 나의 빗장을 열어
내 주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게
나의 부족을 드러내고
나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꼭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래요!
결핍은,
내가 개체로 끝나지 않고
끝없이 연결되어 만물에게 골고루 나눠준
행복의 퍼즐조각을 맞추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 마음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결핍, 연약함은
부끄럽고 감춰야 할 숙제이지만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연결을 통해 한없이 흐르는 행복을
맛보는 사람들에게
결핍, 연약함은
마치 수도파이프처럼 행복의 원천에서
흐르는 물을 배달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창조주는 처음부터 사람을 만드실 때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나 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결혼제도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연약함을 기초로
연결하여 그 속에서 한 없이 솟아나는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맛보게
하려는 창조주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없는 분들은 굳이 신을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제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거창하고 위대한 일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런 경험은 없어서 뭐라 얘기할
자격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살아 보니
모든 행복의 비밀은 둘이 하나 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함께 살자...
이 아침에도 그의 음성이
내 깊은 곳에서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몇 년 전 그는 갑작스럽게 간이 나빠지면서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갔지만
그의 음성은 내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따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살자..." 하던 그 사람.
이젠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지만
이렇게 내 속에 울림이 되어
내 속 어딘가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함께 살 사람이 없어
방황하는 이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전할 때면 그는 다시 살아나 나를 통해
방황하는 그 사람에게로 흐를 것이고
그 사람이 언젠가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행복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그 사람 안에서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영원히 살 것 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두 번째 이야기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만남
1994년 겨울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서울에서의 삶을 성공적인 궤도에 올리고 싶었다.
회사일은 일대로 개인적인 목표를 위한 공부는 공부대로 한참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뭔가 쫒기는 듯 했고 바쁘지만 허전했다. 해도 해도 뭔가 막막하고 그믐달이 으스름한 깜깜한 밤길을 걷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인 기열이가 서울에 출장을 왔다.
기열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한결같이 성실하고 착한 친구였다. 내가 입대한 사이에 그는 키가 너무 커서 현역으로 가지 못하고 18개월 동안 방위복무를 했다. 그러니 나보다 군대를 늦게 갔지만 내가 27개월을 거의 채우고 말년 휴가 나왔을 때 이미 제대를 했었다. 경북대학교 도서관 1층 로비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우렁찬 목소리, 열정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동기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키 큰 친구를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인생의 진실한 모습이 흙이라면서 열변을 토하는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두는 친구들이 없던 터라 내가 지나가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관심을 보이자 다른 친구들은 얼른 자리를 떴다.
(설악산으로 고등학교 수학여행 갔을 때 기열이와 찍은 사진. 내가 좀 높은 곳에 섰어도 차이가 너무 난다.ㅎ)
그는 군에 가기 전 열심히 고시 준비를 했는데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정작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아서 약간 의기소침해 있던 터였다. 그런데 약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말 생기 넘치고 삶에 대한 무한긍정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냐고 묻자 철학강의를 들으면서 김윤동 교수님을 만나고 부터 자기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김윤동 교수님에게 받은 은혜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 대한 자랑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했다. 마지막 헤어지기 전 자신의 교회에 김윤동 교수님과 같은 사람들이 삼백명이 더 있다고 말했다.
(인생의 후반전을 함께 뛰고 있는 지금 그의 얼굴은 고등학교 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게 광이 나는 것 같다.)
나는 그의 삶이 변화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제대하고 복학한 뒤에 기열이와 그의 친구 지완이, 몇 살 터울의 동보, 영길이 등과 자주 만나서 캠퍼스 생활을 했다. 물론 김윤동 교수님도 만나 뵈었다. 그러던 차에 졸업하고 서울로 직장생활을 위해 올라온 뒤로는 왕래가 뜸한 상태였는데 기열이는 가끔씩 손편지를 써서 내게 안부를 묻고 자신의 삶의 향기를 나눠주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었다. 그러던 그가 신입사원 첫 해가 거의 끝날 무렵 겨울 초입에 서울로 출장을 온 김에 나를 만나러 왔다.
기열이는 서울에 있던 우진이 형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박기민 이라는 자신의 교회 형님을 소개해 주었다. ( 그 당시 나는 회사 근처에 있던 역사가 오래 된 큰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왼쪽은 우진이 형, 오른쪽은 후에 내가 신혼살림에 갈 곳이 없을 때 조그만 방 두 개가 있는 집에서 작은 방을 선뜻 내주었던 둘도 없는 친구 병훈.)
기민 형님은 가족이 부산에 있지만 서울 LG 본사로 발령이 나서 혼자서 올라오게 된 것이다.
박기민! 그는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아는 교회 동생의 집에 작은 방 한 칸을 얻어서 생활했다. 부인은 거의 늘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할 만큼 병약했고 아들과의 관계도 썩 원만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늘이 없었다. 언제나 콧노래 처럼 부르던 그의 노래가 생각난다.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그는 늘 그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아픈 삶은 담담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격정적으로 고백하곤 했다.
몇 달간 퇴근 후에 그와 만나 내 삶을 이야기 했고 그는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이상하게 그에게서 뭔가 빛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세례를 받는 예수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고 하는 것처럼 내게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당시 역사가 오래된 큰 교회에 다니면서 주일 오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인 곳에 가서 봉사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경기도 마석에 있는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작은 공동체에 가서 겨울이면 창문에 비닐을 바르고, 빨래나 떨어진 문짝 고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짬짬이 집근처 도서관에서 미래를 대비한 공부도 하면서 회사생활과 개인적 삶을 최대한 충실히 살려고 노력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지만 늘 뭔가 모자라고 부끄럽고 막막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1995년 어는 봄날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기민이 형이 살던 집으로 새벽에 찾아 갔다. 새벽 서너시 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서 내 얘기를 듣더니 내 인생을 지금껏 이끄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네가 지금 힘이 든 것은 함께 살 마땅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살자."
고 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의 대답은 목사님과 함께 살면서 얻은 지혜인 것 같다. 나는 깜깜한 밤이었고 그는 멀리서 솟아오르는 아침햇살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새벽에 그를 찾았나 보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하고 그 때 내게는 기민 형님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 같았다. 내게도 동이 트는가....
새벽에 그의 말을 듣고는 주말에 나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자취방에서 짐을 싸서 주저없이 기민 형님이 살던 작은 방으로 옮겨 같이 살기 시작했다. 기민형님은 침대에서, 나는 그 아래 바닥에서 요를 깔고 잤다. 그 집은 양재동에 있는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었는데 주인은 영채형님이었다. 영채형님의 순수한 마음으로 인해 나는 그저 은혜로 그 집에 들어가 누리기만 했다. 안주인 현숙 누나의 담백하고 맛깔난 전라도 김치와 구수한 영채형의 웃음소리...
비가 오는 날 앞마당의 라일락 꽃잎과 이파리가 떨어지면서 집안으로 스며오는 그 향기... 일요일날 아침이면 그 집 안방이 내집인 양 아랫목에 누워 있노라면 차를 건네던 그 분들의 따스함은 아직도 내 삶에 진한 향기로 남아 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라일락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