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진 틈으로 드러나는 것
첫 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 노트를 펼친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시작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순결한 백지 위라면, 이전의 모든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다시 써봐도, 고작 한두 문장을 넘기지 못하고 손은 멈춘다. 글자는 어김없이 비뚤어지고, 문장은 기어코 마음의 방향과 어긋난다. 머릿속에서 분명했던 생각은 펜 끝에서 종이로 옮겨지는 순간, 알 수 없는 얼룩으로 변질된다.
문제는 도구도, 노트도 아니다. 불완전함이 창작의 기본값임을, 흠집 없는 시작이란 애초에 불가능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다. 이 '어긋남'의 순간을 감내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룩진 현재를 찢어버리라고 속삭인다. 그렇게 '시작'만을 끝없이 반복하며, 단 한 번도 '과정'의 영역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수많은 노트의 첫 장들만 희생양처럼 쌓여갈 뿐, 두 번째 장은 영원히 비어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완벽한 시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다. 새 노트를 찾는 대신, 그 불완전한 상황 자체를 받아들여보기로 한다. '찢어버리는' 대신 '이어가는' 쪽을 선택한다. 별수 없이 얼룩진 자국을 감내하며 그대로 이어나간다. 비뚤어진 글자 옆에 다음 글자를 적고, 어긋난 문장을 수습하는 다음 문장을 잇는다. 그때부터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된다.
깨끗한 백지 위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 생긴다. 지난 흔적과 선명한 글자가 한 페이지 안에서 겹쳐지고 쌓여간다. '실패의 기록'이 '현재의 노력'을 위한 디딤돌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토록 바라는 무언가, 닿고 싶었던 진짜 '나'의 모습은, 애초에 무결점의 백지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흔적(얼룩)'과 '선명한 글자(지금)'가 포개어지며 만들어내는 그 아슬아슬한 '겹쳐진 틈'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수정액으로 덧칠한 자국, 실패를 만회하려 애쓴 흔적, 그 모든 불완전한 역사가 쌓여 비로소 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무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