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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Dec 08. 2016

미씽: 사라진 여자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영화, 책 그리고 술.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시국에서 제정신으로(=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들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책과 술은 비교적 내 취향에 맞는 종류를 고르기가 쉬웠는데, 쏟아져 나오는 신작 영화 중에 가까이하고 싶은 한 편을 고르기가 의외로 가장 어려웠다. 마냥 웃자니 도저히 웃음이 안 나올 것 같고, 슬픈 걸 보자니 더 이상은 울기 싫었달까. (적당히 할 것이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까다로운 관객이다. 나도 안다.) 



그러던 와중에 구세주처럼 ‘미씽: 사라진 여자’가 친절하게도 개봉을 해주었고, 분명 초기 홍보 단계에서는 청불이었던 관람연령이 15세로 하향조정이 되어서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할 마음이 먹어졌다.(나이에 안 맞게 심약한 1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지친 심신을 이끌고 영화관으로 향하게 해 준 동력이 된, 주연배우 엄지원 씨의 한 마디와 함께 이 힘든 글을 시작해 보자.




“여러분, 얼마나 피곤하셨어요. 그 남자들의 욕설과 피가 난무하는 영화 보느라고.. 사실 선택의 폭이 없었잖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렇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새로운 걸 할 때가 됐죠.”






네네!! 정말요!! (야광봉)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요새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더라.


‘저는 여자인데, 여혐 (주:여성 혐오/여성에 대한 혐오나 멸시, 또는 반여성적인 편견)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라는 말은,


‘저는 굶어본 적이 없어서, 빈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라는 이야기.



여성이 아닌 그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얻기 어렵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오직 성별이라는 조건 하나로 다양한 벽에 부딪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를 관람하던 중 몇 번이나 숨이 턱턱 막혀오던 경험 또한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씽의 주인공 지선은 이혼 후 딸아이를 혼자 키우는 커리어우먼이자 워킹맘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조선족 보모 '한매'를 고용하게 되고, 어느 날 한매와 딸이 사라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보통은 바로 이 ‘그러던 어느 날’부터가 영화의 진짜 시작이므로, 이 지점에서 리뷰나 평론도 시작되곤 한다. 나도 이전까지는 그랬다. 터널에 갇히는 순간, 비행기가 떨어지는 순간, 불량 청소년인 딸내미가 사라진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사건 이전의 조건과 영화의 주요 사건 간에 필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자동차 판매원이어서 터널에 갇힌 게 아니고, 기장이 설리여서 비행기가 추락위험에 빠진 게 아니며, 엄마가 연홍이어서 딸내미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마치 게임처럼, 랜덤으로 주어진 조건을 염두에 두고 영화의 주요 이벤트를 따라가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가는 가능성을 그려보곤 했다. 그랬기에 저 영화들이 더 재밌었던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영화를 보던 중 주인공 지선의 일상을 따라가는 초반 그 몇 분에, 나의 사고가 점령당해 버렸다. ‘지선’이 이 나라에서, 일과 육아를 동반해야 하는 여성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아예 이 영화가 시작할 수 조차 없다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미씽에서 주인공의 조건은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나가기 위한 게임의 용도가 아니고 필수 조건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여타 영화들처럼 가볍게만은 소비할 수 없을 거라 직감했다. 아,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건만 결국 시멘트 같은 차가운 현실을 코 앞에서 마주하게 되었구나. 자고로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하더니 내가 딱 그 짝이로군...



결국 이 영화는 ‘아이가 사라졌다’라는 누가 봐도 흥미로운 슬로건을 앞에 걸었지만, 감독이 의도했던 ‘진짜 영화’는 영민하게 저 뒤로 숨겨놓았던 것이다.



그건 바로, 매일같이 영화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나라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고,

극장을 나오는 무수히 많은 관객들의 무의식 속에 뿌리내릴 ‘인식’이었다.


 

보통, 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의 인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엄청난 의미에서 ‘미씽’은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라기보다는, 장르의 특수성을 영리하게 이용한 '한국사회와 여성, 그리고 인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담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미씽은 수 만개의 번데기 중 단 하나의 화려한 나비로 변태하며, 그 존재 가치가 무한대로 폭발하게 된다.








엄마, 이방인, 그리고 여자

보통의 한국 사회에서 ‘아빠’에게는 ‘엄마’라는 대체재가 존재한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어떤 대체재가 존재하는가? 게다가 ‘일하는 엄마’에게는? 당연히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을 집에 들이게 되고 바로 이 ‘어쩔 수 없음’이 시발점이 되어 주인공 지선은 딸을 잃어버린다.




표면적으로 지선은 한매와의 지독한 인연의 끈으로 인해 이런 끔찍한 일을 겪게 되지만, 왠지 영화를 보는 내내 딸을 찾아 헤매는 지선의 고통스러운 여정이 어떤 함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즉,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이 나라의 모든 여성, 엄마, 워킹맘들의 험난함을 이야기로 표현하기 위해 극단적인 장치를 설치한 것일 뿐, 우리는 아이가 사라지지 않아도 저 정도의 고통은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2시간 내내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또한,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악당’인 줄 알았던 ‘한매’조차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의 객관적인 처지가 한매보다는 지선에게 가깝기 때문에, 한매의 시선 즉, 한매의 위치 – 이방인이자 빈곤층 - 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없다. 세상의 편견과 불합리에 늘 불만과 비판을 토해내면서도 결국 나도 내가 선 자리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을 가진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매를 보면서 ‘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했고 도대체 내가 모르는, 아니 사실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추악한 세상의 뒷면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좌절하게 되었다.


공효진은 정말 좋은 배우다.












한국영화에서 ‘남자’의 존재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조연으로 나오는 ‘남자’의 존재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주인공을 물심양면 도와주거나, (큰 의미에서) 배신하거나. 딱 잘라 말하면, 개그를 담당하는 남주의 친구이거나 나쁜 놈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그런데 미씽에서의 남자 배우들은 제3의 영역을 만들어 냈다.(!!) 형사로 분한 김희원 씨의 예상(=분탕질)에서 벗어난 적절한 역할연기도 인상 깊었지만, 아무래도 박해준 배우를 빼고서 이 영화를 논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올 한 해 내가 사랑한 영화 중 상위권인  ‘4등’에 출연한 배우 박해준의 연기는, 미생의 천과장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배우의 눈이, 날카로운 대기업 과장의 눈은 물론이고, 세상만사가 귀찮은 체벌 지상주의 광수의 눈까지 담아낼 수 있다는 데에 순수한 감동을 받았었다. 그런데 미씽에서 이 배우는 또, 밑바닥 인생을 표현해내는데, 이런 세상에! 연기는 물론이고 그가 맡은 캐릭터 자체가 한국 영화에서 처음 보는 인물이다.






영화 '4등'의 광수 그 자체!





그는, 두 주연배우 각각의 이야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둘 사이의 적절한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며, 결정적으로 깽판(!) 치지 않는다. 형사 캐릭터에 이어 두 번째로 놀란 대목이다. 한국영화의 오랜 관객으로서 본능적으로, ‘아 저 사람이 뭔가 마지막에 개판(죄송..)을 칠 거 같은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지선을 사건의 본질로 조용히 인도했고, 결정적일 때 제 몫을 했으며, 한매를 사랑한다고 해서 탄식을 자아내는 선택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행복했고, 앞으로도 (성별을 떠나) 저런 조연 캐릭터를 한국영화에서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대책 없는 희망을 품게 되어버렸다.


 

영화를 보면서 받은 이런 ‘안정적인 느낌’(=아무도 깽판을 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은, 연출과 이야기가 그 어떤 기계보다도 정밀했던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보며 느꼈던 그것과 아주 흡사한 것이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혹시나, 이 글을 읽으면서 다소 불편했을 수 있는, 혹은 공감이 어려웠던 독자에게 최후의 변을 바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무슨 여자애를 대학 공부를 시켜. 고등학교만 졸업시키고 시집보내.

네? 여자가 무슨 부장이에요. 부녀회장이나 하면 다행이지. 하하하

어머 여자분이셔서 당연히 그 팀 막내인 줄 알았어요.




이상은 한국 땅에서 n년간 발 붙이고 살면서 실제 내 귀로 들었던 다양한 발언들이다. 놀랍게도, 실화라는 뜻이다. 혹시 조금은 이해를 도울 수 있을까 싶어서 그나마 지면에 옮길 수 있는 수준으로 추려보았다. (다행히도, 1번 발언을 들은 나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물론, 절교를 선언하셨다….)



아, 밝혀두지만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성과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끼리 싸우자는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단계까지만 가보자는 절박한 비명일 뿐이다.












얼핏, 현대인들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에 기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비이성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 ‘나’의 반대편에는 항상 ‘너’가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살상 무기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이런 ‘무의식의 조각’을 느껴보고, 경계하고 싶다면 이 영화가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꼭 관람하길 권한다.







(+)

엄지원 배우가 딸아이를 찾아 헤매는 첫날 입었던 원피스가,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 딸의 장례식날 입었던 의상과 매우 흡사하여, ‘이거슨 혹시 비없에 대한 오마쥬인가’ (제작 시기 상 그럴리는 없을 것 같다)라고 한 번 그냥 생각이나 해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2016년은 참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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