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그 누구보다 많은 애정과 신뢰를 쏟았던 같은 팀 동료들. 그런데 퇴사 이후따로 만난 팀원이 아무도 없다.
"마음 편해지시면 한번 봬요."
그렇게 예의 바른 문자와 전화가 오긴 했지만, 모두가 안다. 날짜와 시간을 특정하지 않은 그런 말은, 그저 빈 약속. 굳이 노력해서 만날 의사가 없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퇴사 이후 다른 팀에 있던 전 직장 동료들과는 더 가까워졌다.
휴가 써서 일부러 만나러 찾아오신 분, 전화 연락 안 된다며 걱정돼서 집 앞까지 와서 기다리다 가신 분, 따로 퇴사 축하 저녁모임 만들어주신 분, 외부 컨택들 소개해주겠다며 자리 마련해 주신 분 등등.
일하면서 이런저런 고충을 함께 겪었던 분들이다. 저 과에서는 저분이 실력자군, 일 좀 하시는군, 나와 일하는 방식이 잘 통하는데, 그랬던 분들.
그런 걸 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매일 함께 시간 보낸 이들과의 관계는 뭐랄까, 애증의 관계랄까. 한 팀에서 운명 공동체로서 서로 의지하고 돕게 되지만. 한편으론, 서로 업무상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비교평가되고,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경쟁하게 되고. 특히 전 회사에서는 비슷한 업무를 맡고 있는 비슷한 직급들을 한 pool로 묶어서, 성과기반 수당제(merit based compensation)로 임금을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친절하고, 프로페셔널하게 대할 것.
절대 부탁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선의를 베푸는 것 금지.
성급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 내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조언해 주는 것도 금지.
서로 기분 좋게 도움 주고받을 정도.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어지지도 않게 거리를 유지할 것."
같은 팀원들과는, 그 거리를 잘 지키는 것이 핵심인 듯하다. 퇴사 이후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다.
대신 다른 부서나, 다른 조직에 있는 사람들과 그만큼 강한 유대는 아니더라도, 폭넓은 네트워크를 만들고, 괜찮은 '평판'을 만들어두어야 한다.
네트워크 이론에서 배운 대로, 이런 약한 고리(weak tie)에 있는 분들의 도움을 실제로 많이 받았다.
전북 완주군 '리안정'. 나중에 꼭 와서 머무르고 싶은 작은 다락방, 그리고 집안 곳곳 여러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던 곳.
나와 일하는 스타일이 비슷한 M.
남과 불필요한 경쟁하는 대신, 오롯이 내가 맡은 일이 성공적으로 되는데 집중하는 스타일. 남의 평가대신 내 기준에 맞게, 내가 만족할 정도의 성과가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도 그동안 회사 내에서 이런저런 부침이 많으셨던 것 같다. 그래선지 내 퇴사과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 이해해 주고, 응원해 주고, 도와주려 한다. 회사에서 일할 땐, 건물이 다르기도 하고, 업무가 달라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퇴사 이후 부쩍 친해졌다.
"우리 같이 전주여행 가서 맛난 것 먹자,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 있는데 같이 가보고, 내가 아는 작가님도 같이 만나보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 잘하는 직장 동료, 지금은 회사를 떠났지만 앞으로 더 큰 일을 할 사람"이라 소개해준다.
이것이, 어른으로써, 그리고 같은 동료로서 최고의 위안과 격려가 아닐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이제는 업무와 관련한 이해관계도 없어졌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좋은 사람"이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는 것.
아무리 불편한 곳에 머물러도, 어떤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다 좋다. 이런 선배와 함께라면. 이런 한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큰 힘을 얻게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인생선배가 되어야겠어, 그런 결심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2박 3일 전주, 완주 여행.
솔직히 말해서, 전주 한옥마을나름의 아늑하고 멋들어진 느낌은 닳아버렸다. 명동이나 홍대, 어디서나 볼만한 인생 네 컷 사진점, 소품점, 게다가 경주 십원빵 가게까지, 컨셉이 이게 뭔가 싶다. 한옥들과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간판들도 아쉽고. 상업화되면, 어디나 다 비슷비슷한 모습이 되고 마는 걸까.
대신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완주군에 있는 아원고택, 오스 갤러리, 그리고 주변의 한옥마을이었다. 왠지 광주, 전주지역 지인들이 전주 한옥마을 대신 이곳을 추천하시더라니.
높지 않은 산, 운무가 나무들 사이를 느릿느릿 스쳐 지나가는 풍경. 아침엔 봄을 맞이하려는 달달한 봄비인가 싶다가, 오후가 되니 아직 오들오들 추위 품은 겨울비 같기도 한 하루. 퇴청마루에 앉아 멍 때리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명상하는 기분이었다.
아원고택 갤러리 전시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공간 곳곳 하나하나 다 풍경화 작품 같은 느낌.
아원고택을 건축하신 전해갑 대표님께서는, 한옥은 단순한 건축물의 의미를 넘어 넘어, 해체와 재조립이 가능한 디자인이자, 설치미술이라 하셨다. 실제로 아원고택도 경남 진주, 전북 정읍과 전남 함평에 있던 여러 한옥들을 해체해서, 완주군 아름다운 공간과 어우러지게 재배치한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 고귀한 품격을 품고 있는 것들은 그 어디에 있던, 다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고 재창조될 수 있다. 여러 곳에 있던 오래된 한옥들이 이곳에 이렇게 모여, 새로운 곳에서 현대 건축물과 어우러지듯이 말이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진정으로 소중한 인연들도, 어떤 계기로 인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고 재창조된다. 다음 단계로 그렇게 무르익어가고. 새로운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고 어우러지고, 함께 존재하다 사라지게 되겠지.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을 보고 경험한 소중한 하루.
그나저나 주중에 훌쩍 여행 갈 수 있다니, 이건 정말 백수의 특권이다. 붐비지 않는 고즈넉함과 여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