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친구가 평생 친구다’ 라는 식의 말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연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도 우리 할머니는 경로당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뒷동산 산책 크루를 만드셨다고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은 누군가와 가장 손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간임에는 분명하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또래들과 반강제적으로 함께 보내는 이러한 환경이야말로 사교적인 아이들에게는 황금 같은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매 학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나에게 던져진 도전 과제같았다. 어떤 해는 유난히 힘들었고 어떤 해는 운이 좋았다. 그래도 낙오되지 않고 꾸역꾸역 매년 한두 명의 친구를 만들었던 어린 나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어른이 되고 나니 관계 맺음이 수월해졌다. 적당히 마음이 단단해지고 나를 좀 더 잘 알게 된 성인이 되고 나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이 요즘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이제 더는 어리다는 말은 예의상으로라도 듣지 못하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감사하게도 아직 틈틈이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러한 인연들은 학창 시절에 만났던 친구들과는 모양이 다르다. 몇십 년을 다르게 살아와 본연의 모양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이 어떤 면에서는 새롭기도 해 그들과의 우정을 흥미롭게 만든다. 많은 부분이 고정된 채 만난 사이는 서로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말랑했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갈등의 조율이 어렵다. 그래서일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의 관계 맺음은 조금 더 조심스럽다.
최근에 가까워진 지인과 인연을 끊게 되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어린 시절처럼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서 표나게 티를 내 거나, 싸우거나, 삐지거나 하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과의 만남 횟수를 조용히 줄여나가고 점점 연락을 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와 의도적으로 인연을 끝낸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씁쓸하긴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같은 취미 학원에 다니며 친해진 언니였다.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큰언니뻘이었는데, 학원을 마치고 언니가 추천한 맛있는 식당들에서 술을 한 잔씩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엔 두 세 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나중에 가서는 학원 수강생의 삼 할 정도가 함께하는 큰 모임이 되었다. 언니는 이런 모임이 익숙하다는 듯이 턱턱 알맞은 식당을 예약해서 우리를 이끌었다. 자연스레 관계도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언니가 소개한 식당에 주로 가곤 했지만, 가끔 내가 가게를 고르는 일이 생기면 꼭 안 좋은 점을 찾아 가벼운 타박을 했다. 밤늦은 시간 다들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던 차에 소개했던 육회집은 다들 맛있게 먹어주는 와중에 비싸다는 이야기를 한마디 보탰고, 내가 어릴때부터 좋아하던 쌈밥집을 소개하자 본인이 아는 집이 더 맛있다며 다음엔 거길 가보자는 이야기를 던졌다. 내가 예민한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어느 날 친구와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에 다녀온 날이었다. 간만에 인스타에 사진도 올리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며칠 뒤 만난 언니는 대뜸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칵테일바 다녀왔더라? 나도 가봤는데, 별로지?
나는 인스타에 그 바가 별로라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 술집이 마음에 들었다. 분위기도 좋았고, 접객도 훌륭했으며 칵테일도 맛있었다. 같이 시킨 안주가 살짝 취향에 벗어나긴 했지만, 나머지 부분이 훌륭해 그 정도는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좋은 경험으로 간직하고자 했던 하루가 그 언니의 한마디로 인해 흠이 나버린 것 같았다.
나도 당연히 언니가 소개해 준 식당이 내 마음에 모두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괜찮다던 어떤 갈빗집은 평범한 수준이었고, 언니가 아끼는 초밥집이라고 멀리까지 걸어서 찾아간 집은 다시는 그 가격을 주고 먹고 싶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가 추천한 그 식당들에 대해서 뭐라고 비난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함께했던 모든 식당이 다 맘에 안 들었던 것은 아니다. 개 중에선 괜찮은 식당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에 안드는 식당에 데려갈 때에도 취향이 다르겠거니 하고 넘겼을 뿐이다. 하루키의 어느 책에서 ‘입맛은 로컬이다’라는 구문을 읽으며 머리가 반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고말구. 입맛은 로컬이다.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 나라에서 한끼 한끼 켜켜이 먹어오면서 발달한 미각의 경험들이 모여 우리의 식성을 창조해낸다. 그 갈빗집과 초밥집 모두 오랜 기간 영업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에게는 사랑받는 식당일 것이다. 내 기준에도 맛이 아예 없는 식당은 아니었다. 다만 내 입에는 썩 맞지 않아 또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을 뿐. 그렇기에 난 괜한 말을 더하지 않고 그릇을 싹 비웠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아직 잘 모르겠다. 타인의 선택을 깎아내리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네가 다녀온 식당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맛집 애호가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너는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고급 입맛을 가진 나에게는 별로였다는 본인의 예민한 미뢰를 자랑한 것일 수도 있겠다. 혹은 나의 식당을 고르는 안목에 대한 비하였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앞으로는 이왕이면 본인이 추천하는 더 나은 곳을 가라는 선한 의도인 것이었을까? 꼬인 사람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다. 정답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그녀의 아리송하고 해석하기 힘든 비난을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졌다. 내 경험, 내 선택, 내 선호를 인정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애정이 식어버렸다. 어쩌면 별 의도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녀에겐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대화 중 하나였을 수도 있겠다. 그저 부정적인 말들이 한없이 익숙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온전히 파악하기엔 함께한 기간과 나의 사회적 경험치가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가 나에게 한 말들에서 나는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타인의 선택을 비하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랜 식으로 그러한 삶을 보내왔을 그녀를 몇 마디 말로 쉽게 바꿀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너무 딱딱해져 버린 채 만났다. 나는 조용히 연락을 줄여나갔다.
대신 나는 내가 고른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어주는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끔 우리도 선택에 실패에 맛없는 한 끼를 때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처럼 그 식당을 고른 당사자를 애매하고 모호하게 타박하지는 않는다. 그저 ‘에이 이번 식당 꽝이었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뒤 입가심을 할 맛있는 카페를 물색한다. 맛이 있든 없든 행복한 식사다. 소화도 더 잘 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