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친구를 소개받는 자리였다. 오랜 시간 함께한 좋아하는 친구의 친구였던데다가, 그동안 건너건너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은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는 것 같은 설렘을 앉고 자리에 나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몇 마디를 나누어보았다. 그동안 친구가 말해준 단편적인 일화들로 혼자 상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내 친구가 말한 그는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공부만 한 아이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가 보는 그는 생각보다 시니컬하고 직설적인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내 친구는 나와 닮은 점이 참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의 또 다른 친구인 그는 정말 나와 그리고 내 친구와도 공통점이라곤 찾기 어려워 보였다. 내 친구가 쟤랑 친하다고? 쟤랑 어떻게 놀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래도 또래라는 공통점을 붙잡고 근황이라든지 요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러던 중 내가 새로 시작한 운동에 대해 말을 꺼냈다. 또 다른 친구의 추천으로 운동을 시작했던 때였다.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던 나였지만 의외로 아무 기대 없이 시작한 운동이 너무나 즐거워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차였다. 신이 나서 친구에게 요즘 하는 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일상의 활력소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고 꾸준히 해보려고 한다는 말하고 있던 중, 친구의 친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너 남자 만날려고 운동하는 거지?
음? 이게 무슨 소리람? 마침내 취미다운 취미가 생겨서 너무나 신나하던 나였기에 남자 회원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센터도 딱히 친목을 다지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며 운동 강도가 상당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남자건 여자건 누군가를 볼 겨를도 없이 친구와 둘이 뻘뻘 흘린 땀을 닦으며 프로틴을 마시고는 샤워실로 직행했다. 물론 남자를 만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뭐 그리 잘못도 아닐 테지만, 정말 나는 딱히 그런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런 건 아니라고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고, 조금도 그런 마음이 없다고?’ '
왜 아니라는 데 말을 못 믿니… 오기가 생겨 몇 번을 아니라고 부인했는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아니라고 입씨름을 하기엔 ‘내가 다 알아.’라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쏘아대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괜히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까 하는 걱정에 ‘그래. 뭐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겠지.’라고 억지로 동조하는 듯한 답변을 하자 그제야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거 봐 그럴 줄 알았어.’라고 얄팍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오만한 추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끝까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하고 적당히 맞춰준 나에게도 화가 났다. 그가 나에 대해서 아는 정보 역시 내가 그를 아는 정보의 양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본인의 좋게 말하면 경험, 나쁘게 말하면 편견에 맞추어 내 행동의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추측한 의도도 불순했다. 남자를 만나려고 운동을 한다니, 실제로 내가 그런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섣불리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보는 상대에 대한 추측치고는 굉장히 폭력적인 종류의 그것이었다. 또 나는 상대에 대해 이러이러 할 것 같다는 추측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추측이 칭찬에 가까운 것이라도 말이다. 상대에 대한 어떠한 판단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우선 마음속에 담아두자. 대부분이 섣부른 판단일 경우가 많다.
그 아이의 무례한 말에 화가 난 것과 동시에 나는 내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내 친구가 그런 아이랑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무신경한 사람과 나보다도 더 가까이 지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떤 면이 잘 맞아서 그런 아이와 함께하는지, 저런 이야기를 하는 저 사람의 모습이 내 친구에게는 거슬리지 않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와 내 친구가 긴 시간 함께 했고 그동안 별일 없이 잘 맞아 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친구의 모습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친구의 모습이 그 아이와 잘 맞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끼워 맞추기 같기도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성격은 다양한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람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면들이 내면에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성격의 조각들은 항상 동일한 빈도와 강도로 발현되기보다, 특정 상황 혹은 특정 관계에 따라 발현되는 조합이 달라지는 것 같다. 일부 특성 조합들이 상황에 따라 우세종처럼 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가족들과 있을 때는 ‘가족들을 챙기는 마음 깊은 장녀의 성격 조합’이 나타나며, 오래된 회사 선배들과의 모임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실없는 소리도 잘하는 막내 성격 조합’들이 나온다. 새로운 팀의 회사 동료들과 있을 때는 ‘시니컬하고 현실적인 성격 조합’이 대학교 친구들과 있을 때는 ‘둥글둥글하고 무난한 성격 조합’ 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다중 인격 같지만 모두 내 안에 혼재되어 있는 특성들이며 다만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서 특정한 나의 모습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내 친구와 함께할 때 드러나는 성격 조합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조합이 친구의 조합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음 내 친구도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 조용한 성격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친구와 유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친구의 그런 면도 여러 다양한 성격 중 일부였을 것이다. 친구도 친구 나름의 다양한 성격 조합을 가지고 있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조합들이 나오게 된다면? 그 다른 조합이 나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조각들이라면? 친구의 친구가 항상 내 친구일 수는 없다는 당연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그의 발언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날 한마디 제대로 못 해준 것도 억울하고 그날 이후로 볼일이 없어 이 화나는 마음을 무신경한 그 아이에게 전하지 못한 점도 화가 난다.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것은 운동을 하다가 정말 간혹 훈훈해 보이는 남자에게 눈길이 가게 되면 그때 그 아이의 말이 정답이 되는 것 같아 괜히 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결국 지지 않기 위해서는 남자에게 한눈팔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근육을 얻고 남자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