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의 점심, 점심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오후 느지막한 시간. 간단하게 떡국을 끓여 한 끼 때워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스레인지의 불을 올렸다. 나는 푹 퍼진 떡국을 좋아한다. 턱에 불필요한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입안에서 물렁물렁하게 씹히는 그런 떡국이 좋다.
나는 꼬들한 라면을 좋아한다. 라면 봉지 뒷면 권장 조리 시간의 절반 정도만 재빠르게 삶아 생라면과 푹 익은 라면의 중간 정도 되는, 면발의 심이 분명하게 살아있는 그런 라면을 좋아한다.
나는 왜 푹 퍼진 떡국은 좋아하면서 푹 퍼진 라면 면발에는 분노하는 걸까?
사람의 취향은 불필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고 이상할 정도로 비논리적일 때가 많다. 이는 분명 그간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나름대로 얽혀 만들어진 합당한 선호체계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호체계의 형성과정이 항상 논리적으로 설명되지는 않기 때문에 어느 순간 굳어진 나의 취향들은 때론 모순적이기도 하다. 나의 취향은 몇십 년에 걸쳐 한 장 한 장 쌓여진 모순이고 타인의 취향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에게 다가온 완성된 형태의 모순이다. 나름 나름의 경험으로 쌓인 타인의 취향은 우리에게 잘못 만든 기계의 설명서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순에는 한없이 관대하며 타인의 모순에는 날을 세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완전한 타인의 입장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없다. 살을 부대끼며 사는 가족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내가 한 번도 타인의 완전한 입장이 될 수 없다는 점은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순진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회사 옆자리 나이 든 아저씨인 줄만 알았던 부장님이 알고 보니 취미로 영화 평론을 쓸 정도로 예술 영화광이기도 하고 별 생각 없이 널널하게 회사생활을 하는 줄 알았던 후배가 퇴근 후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다기에 놀란 적도 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들도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혹은 말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타인의 생각지 못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때에는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겠구나 라고 속단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대학 시절 학회에 가입 했었다. 정치 외교학 학회였는데, 부끄럽게도 학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신입생들이 모두 학회에 하나씩 가입하길래 나도 가장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가 가입한학회에 따라 들어갔다. 대표 격인 선배는 외국 석학의 두꺼운 정치학책을 교과서로 지정해주고 어느 분량까지 읽어오라고 했다. 학회에 큰 관심이 없었고, 입학하자마자 과외를 하느라 바빴던 나는 책을 대충 눈에 바르고 학회 미팅에 들어갔다. 몇몇 준비를 많이 한 신입회원들이 한마디씩 말을 꺼냈다. 준비가 덜 된 나는 부끄러웠지만 이번에는 책의 내용을 정확히 숙지하지 못해 말할 의견이 없으니, 다음번에 열심히 읽어오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학회의 첫 미팅이 끝나고 별로 친하지 않은 남자 동기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는 왜 생각을 안 하고 사니?’
내가 생각을 안 한다고? 내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지 따져 묻고싶었지만 그날도 역시 나는 어버버하며 스쳐 지나가는 그 학우를 보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렇게 말 한마디 못하고 보내버린 것이 억울해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되었다. 하루 발표에서 말을 못 했다고 순식간에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 있는 발언이다. 나는 생각이 없지 않다. 오히려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항상 꽉 차있는 답답한 사람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꼭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생각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와 주말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며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곱씹어보고, 자기 전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삶을 상상해보고. 이 모든 것이 생각이다.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며, 나에게 악의로 가득 찬 독설을 내뱉고 지나간 그는 나에 대해서 그 짧은 시간을 통해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었다. 몇 년 몇십 년을 두고 보아온 사이라 해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평가를 쉽게 내려서는 안된다.
또한 생각을 좀 덜 하고 살면 어떠한가? 꼭 정치학의 흐름에 내가 거창한 의견이 있어야 했던 걸까? 나는 회의를 방해하지도 않았고 열심히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회의에 참여했다. 내가 그에게 해를 끼친 것은 전혀 없는데, 그는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저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졸업하고는 근황을 듣지 못해서 뭘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으나, 못된 입버릇으로 호되게 당했길 가끔씩 그러나 꾸준히 빌어본다.
나의 취향은 모순적이다. 나의 생각은 나 외에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때로는 나조차도 모순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다면적이다. 나는 대상 장소 시간에 따라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며 존재한다. 인간은 다면적이다. 내가 모순적이고 입체적인 사람인 만큼 다른 이들도 다양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내가 본 타인은 온전한 타인이 아니다. 내가 나의 편견과 선입견을 더해 인식한 타인이다. 나의 폭력적인 편견에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싶다. 생각이 없다고 쏘아붙이던 동기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고마워. 잘 지내지 않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