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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06. 2022

하동관

윤수진이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는 법 (1)

나의 주말은 대체로 여유롭다.


별다른 약속도 없고 해야 하는 일도 딱히 없는 날에는 일종의 루틴처럼 종로나 명동으로 향한다. 코로나 이후에 더더욱 생기를 잃은 구도심이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적해져 오히려 좋다는 마음이었다.  명동 근처의 대학을 나온 엄마는 언제부턴가 한 달에도 몇 번씩 명동과 종로 일대로 나를 데리고 나왔다. 회사일에 지친 아빠는 외출을 귀찮아했다. 평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주말에도 티브이를 보다가 졸다 잠들었다를 반복했다. 나는 대부분 방에서 책을 보며 주말을 보냈다. 그러다 아빠가 잠이 들면 잠시 주인이 없어진 티브이를 보았다. 불행하진 않았지만 조금 지루했다. 밖에 좀 나가자는 몇 년간의 설득에도 굳건한 아빠의 모습에 지친 엄마는 단란한 가족 외출은 포기한 채 내 손을 잡고 시내로 향했다.


종로에 가는 날은 실컷 책을 볼 수 있었다. 책으로 가득 찬 종로서적의 복도를 지나면서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을 하는 일을 무척이나 즐거웠다. 읽고 싶은 책을 몇 권씩 골라 복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절 서점의 직원들은 책장에 기대어 책을 사진 않고 읽기만 하는 이들을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다. 책과 티브이를 끼고 살다 보니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두꺼운 안경을 쓰게 되었다. 시간이 좀 더 많은 날에는 교보문고를 들렸다. 천장에는 꼬마전구들이 별자리같이 종종 달려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벗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꼬마전구들의 초점이 흐려지며 천장이 온통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재밌어 교보문고에 갈 때면 안경을 벗고 꼭 한 번씩 위를 쳐다보았다.


엄마와의 외출은 즐거웠다. 괜히 싫다는 아빠를 데리고 억지로 나가는 교외보다 엄마와의 외출이 훨씬 기다려졌다. 책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외출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생각에 설레었다. 교보문고에 갈 때면 의례처럼 교보문고 구석의 식당 코너에 들리곤 했다. 멜로디스라는 이름의 분식점에서 엄마와 나는 소고기 김밥과 유부초밥을 시켜 나눠먹었다. 교보문고에서 파는 김밥은 엄마가 소풍날 해주는 김밥과는 다른 맛이 났다. 일본식 그릇에 담긴 커다란 김밥과 유부초밥은 그 당시의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이국적인 문화 체험이었다. 김밥을 시키면 주는 무한리필 장국 역시 새롭긴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나 배추가 듬뿍 든 된장찌개만 먹었던 나에겐 처음 먹어보는 일본식 장국이라는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다진 소고기가 들어간 커다란 김밥을 한입 가득 넣고 목이 메면 뜨거운 장국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엄마의 기분이 좋은 날에는 멋쟁이 여학생이 되는 법이나 학교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만화책을 살 수 있었다.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자연 탐구책이나 아동소설책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어떤 쪽이든 만족할만한 외출이었다.


어느 날은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에 가면 꼭 엄마 친구가 하는 지하의 일식집에 들렀다. 엄마의 대학 친구인데 굉장한 부자라고 했다. 엄마 친구에게 쑥스럽게 인사를 했다. 엄마는 친구와 잠시 수다를 떨었고 나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나오는 길에 엄마는 친구가 돈도 많은데 결혼을 안 해서 불쌍하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이렇게 큰 가게도 가지고 있는데 뭐가 불쌍하냐 되물었다. 엄마는 그래도 그게 아니라고 했다. 명동에 오면 세 번 중 한 번은 명동교자에 들렸다. 엄마는 마늘 김치를 좋아했다. 나도 맛보겠다고 우겨서 한입 먹어본 김치를 먹자 볼 안쪽이 따가워졌다. 매워서 헥헥 대면서도 나도 그 마늘 김치가 계속 당겼다. 엄마는 양념이 덜 한 부분을 골라 물에 씻어 주었다. 나는 아이 매워하면서도 물에 씻긴 김치를 잘도 받아먹었다. 알싸한 매운맛이 자꾸만 입을 당기게 만들었다. 엄마는 매운 마늘 김치를 연신 먹었다. 나도 엄마를 따라서 계속 먹었다. 다 먹고 나오는 길에는 가슴까지 시큰시큰거렸다.


마늘 김치를 물 없이도 잘 먹는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할 일이 없으면 종로나 명동으로 향하곤 한다. 이제는 서점에 가도 옛날처럼 그렇게 즐겁지 않다. 활자를 보면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커진다. 교양서를 보면 내가 모르는 지식이 저만큼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소설을 보면 소설을 읽을 시간에 잠이나 한 숨 더 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서점을 간다. 요즘은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인지 둘러보고 사지 않을 룸 스프레이나 다이어리 구경도 빼먹지 않는다.


지난주에는 명동 하동관에 들렸다. 딱히 할 일이 없어 교보문고에 들렸다가 발걸음이 명동까지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교보문고 멜로디스에서 김밥과 장국을 먹었겠지만 멜로디스가 없어진지도 교보문고 천장의 전구 불빛이 없어진지도 오래전 일이다. 이제는 서점에 가도 책을 사는 일은 거의 없다. 예전보다 비교도 안되게 줄어버린 독서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책을 살 일이 생기면 이북을 사게 된다. 집에 책을 놓을 자리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읽는 책은 옛날 눈이 나빠지도록 읽었던 그 책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서점에 갔다. 서점에 가면 서점에 가는 사람이 되었다. 서점에 가는 사람은 책을 읽는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그 언저리쯤은 되는 느낌이었다.


그날도 괜히 교보문고를 한 바퀴 돌고는 종각을 지나 명동으로 향했다. 점심때가 한창 지나 허기가 돌다 못해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뭘 먹지? 명동에 오면 선택지는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새로 생겼다는 유명한 신식 식당들은 선택지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도 1인 손님은 환영하지 않을 것이었다. 요즘 인기 있다는 훠궈 집이 궁금하긴 했지만 혼자 온 손님 맞은편에 인형을 놓아준다는 인터넷 게시물을 보고 같이 먹을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명동에 오면 거의 높은 확률로 명동교자, 명동 돈까스, 하동관, 함흥면옥 네 군데 중 한 군데를 방문했다. 모두 혼자 오는 손님을 개의치 않는 곳이었고 모두 엄마와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식당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이 많은 손님들이 많았고 그 점이 내겐 오히려 편했다. 오늘은 하동관이었다. 함흥면옥의 시원한 물냉면과 고민하긴 했지만 든든한 국밥이 먹고 싶었다. 엄마는 함흥면옥에 갈 때마다 여기서는 회냉면을 먹어야 한다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곤 했다. 엄마랑 둘이 왔다면 함흥면옥에서 물냉 하나 회냉하나를 시켜먹었을지 모른다. 그럼 나는 양이 적어진 엄마의 회냉면을 몇 젓가락 뺏어 먹고는 시원한 육수로 입가심을 했겠지.


점심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하동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방 앞의 가장 시끄러운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뜨끈한 국밥이 나왔다. 테이블 위의 파를 잔뜩 넣고 허겁지겁 시장기를 달랬다. 따뜻한 밥알이 종일 시내를 서성거린 나의 고단함을 씻어주었다. 한 술 더 뜨려던 차에 종업원 아주머니가 다른 손님과 합석을 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국밥에 파묻혀있던 고개를 들어보니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이 테이블 근처에 와있었다. 꾸벅. 말 대신 고갯짓으로 수락을 했다. 그녀의 국밥도 금방 테이블에 도착했다. 그녀도 파를 잔뜩 넣고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서로 맞춘 것도 아닌데 서로의 밥이 줄어드는 속도가 꽤 비슷했다. 어느 정도 밥을 다 먹어가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깍두기 국물을 부었다. 빨개진 국물과 남은 밥을 싹싹 긁어가며. 어느새 누런 놋그릇은 바닥을 향해갔다. 완식. 국물까지 싹 해치운 행복한 한끼었다. 앞자리 그녀도 나도 송골송골 맺힌 땀에 앞머리가 살짝 젖어있었다.


맛있는 점심이었고 좋은 점심 파트너였다. 문득 내 앞의 그녀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식당을 같이 다니며 별다른 대화 없이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명동 돈까스의 코돈브루가 너무나 당길 때가 있었다. 하지만 반쯤 먹으면 영락없이 질렸기 때문에 갈 때마다 고민하다가 로스까스를 시키곤 했다. 하동관을 좋아하는 아니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와 이따금 명동에서 같이 밥을 먹고 싶었다. 로스 하나 코돈브루 하나를 시켜 반반씩, 물냉과 회냉을 시켜 조금씩 나눠먹고 싶었다. 혼자 먹기에는 명동교자의 칼국수와 만두는 너무 많았다. 매번 칼국수 하나를 시켜서는 옆 테이블의 만두를 아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둘이 가서 칼국수 두 개에 만두를 하나 시켜 든든히 먹고 싶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접고 조용히 짐을 챙겼다. 내가 부스럭거리자 그녀도 휴지로 가볍게 입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입구 근처에서 보리차를 마시며 마음의 인사를 나눴다.


잘 가요. 참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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