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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Me Feb 03. 2019

# 고산병보다도 무서웠던 사람들.

세계여행레시피. 페루 와라즈

많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에콰도르에서도 고산 지역에 다녀오길 반복하면서 고산이 조금은 적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와라즈 69호수에 가는 일에 있어서 고산병은 나에게 큰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다만, 1박2일에 거친 에콰도르에서 페루 와라즈까지의 이동이 조금 더 걱정될 뿐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마법이 시작되는 날, 장장 1박 2일에 거쳐 하루 꼬박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될 줄을.

화장실 하나 가는 것조차 내 맘 같지 않은 이 곳에서 최악의 버스 탑승기를 거치게 되었다.



아침이 오기엔 아직 이른 새벽_

버스 안에서 기다릴 수도 없어 밖에 우르르 나와 도장을 받기 위해 모기들에게 헌혈을 해가며 밖에 서있어야 했다. 입국심사라도 할만한 것도 없었기에 그저 도장만 찍어주는 작업만 거칠뿐 특별할 게 없었던 입국심사는 나를 비롯 많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페루 입국도장 하나에도 심장이 쿵쾅, 요란을 떤다.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도 아직은 설레던 때였다


여러 버스를 거치고, 터미널을 거치고 나서야 도착한 와라즈의 아침은 조금 부산스러웠다. 

여기저기 팔려나가는 닭들 사이로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해 리어카를 끌고 가는 장사꾼들이 오고 가고,

신호등이 의미 없는 이곳에서 그저 주변만 기웃거리다 이내 남들을 따라 차도를 걷는다. 





에콰도르와 닮은 듯 다른 느낌의 사람들의 시선이 아시아인 여럿이서 우르르 배낭을 메고 지나가는 무리에 꽂혔다. 



"저렴한 숙소를 소개해줄게!!"

"이것 좀 사주세요" 

"내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뭐 찾고 있니?" 




돌아가며 다가오는 이들을 뿌리치곤, 결국 피곤함에 찌들어 도착한 곳은 '아킬포'였다.


한국인들이 많이 간다는, 거의 한인 호스텔이라고 봐도 무방한 곳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이 곳을 거쳐갔다. 삼 형제가 하는 곳이라 아킬포 삼 형제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짐을 풀어놓고 69호수 투어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듣고는 예약부터 잡고 한 숨 돌렸다.


이 곳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대게 무리 지어 저마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화에 크게 낄 수도, 그렇다고 자리를 내어준다거나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같은 한국인, 같은 여행객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국인들이 반가웠었지만, 

모두 나 같은 건 아니니까. 

그런 그들이 낯설고 불편했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었다. 

개인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엄연히 다르다. 


훤한 대낮에 자신이 잔다는 이유로 불을 꺼두고는, 우리가 체크인을 하고 불을 켜자 

그것이 불편하다는 듯 티를 내는 그 사람을 우리가 이해했어야 한 걸까? 

이른 새벽, 모두 69 호수 투어를 가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욕실이 하나뿐인 이 곳에서 30분간 샤워를 하느라 

모두 씻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던 것 까지 이해했어야 한 걸까?


웃긴 건 저들끼리 일행이라는 게 참 웃겼다. 

마음이 하늘같이 넓진 못했기에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산병이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보다는 언짢음만 더해졌다. 

괜스레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와라즈였다. 

내가 한국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불편해하게 되던 때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한껏 받고 있던 민폐남의 일행이 빨리 나오라고 

욕실 문을 두들기고 보채고 나서야 나갈 준비를 마치고 투어 차량에 시간에 맞게 올라탈 수 있었다.


69호수 투어 행렬의 끝머리에 기어오르듯 천천히 오르고는, 

실컷 힘들게 올라간 곳에서 별거 아닌 일로 다퉜다. 

내 입장에선 투정이었겠지만, 그의 입장에선 짜증일 수 있었을 문제였고 

나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 그에겐 상처일 수 있었을 문제였다. 

그의 서운함은 화로 바뀌었고, 그가 화내는 게 나는 또 서운했다. 

단순한 동행이었다면 싸우지 않았을 문제를 연인이기 때문에 늘 싸우게 되는 것이 여행하면서 연애하는 장단점 중 가장 피곤하면서 힘든 단점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와 떨어져 혼자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이런 모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어서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무언가에 쫓기듯 미친 듯이 서둘러 내려왔다. 






거의 일 순위로 차에 도착해 멍하니 앉아있으니 열이 올랐다. 

그저 급하게 내려온 탓이거니 숨이 차서 그런가 보다 하고 쉽게 생각했고 열은 이내 가라앉을 생각을 않고 속에서 펄펄 끓기 시작했다. 


나는 꽤나 건강한 편에 속했다. 

가끔 이따금씩 아프면 너무나 크게 아프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래 봐야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니까 하고 내 건강을 너무 신뢰했었나 보다. 


그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오늘 일어나려는지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싸운 마당에 아프다고 어리광을 피울 생각은 1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철없는 자존심이었다. 



오늘 밤, 심야버스를 타고 리마로 향할 예정이었기에 이미 체크아웃을 한 상태라 꼭대기 층의 

휴게공간 한 구석에 기대고 앉아 버스 타기 전까지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열이 밖으로 안 끓고 안에서 끓는 편이라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몸은 또 얼음장이라 밖으론 오들오들 떨어댔다. 

그와 동시에 점점 숨이 가빠져옴을 느꼈다. 머리는 띵하고 숨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일행들은 짐을 찾아 저마다 짐을 가지고 올라왔다. 


여기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줄 생각 없던 모습에 실망스러웠던 게. 

딱히 도움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랬다. 내입장에서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던 그런 생각.


'나였으면 안 그랬을 텐데..'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이미 실망한 그 누군가에게 짐을 부탁하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나 때문에 일정을 바꿀 수도 없고 하니 짐을 챙겨야 지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기러 가던 것 까진 대강 기억은 난다. 


그다음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그리고 그 한국인 많은 그곳에서 소파 한가운데 뻗어있던 기억. 


열에 홀린 듯 비몽사몽.

어느새 아킬포 형제들에게 둘러 싸여 산소 스프레이를 마시고 있는 

내 상태를 보고는 고산병인걸 알 수 있었다. 

산에서 급하게 내려올 경우에도 걸린다는 것도 그제야 듣고는 알 수 있었다.


산소 스프레이를 한참이나 들이마시고 나서야 가빴던 숨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코카 차를 계속해서 마시고 나서야 끓어오르던 열감은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너 병원 가야 해." 

아킬포 삼 형제가 나 때문에 모여서는 심각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싫어.. 안 가도 돼. 이젠 괜찮아. 너무 고마워" 

"이렇게 가다 죽은 사람도 있었어. 위험해" 

"이제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병원에 가자" 



여행자 보험도 기껏 비싼 걸로 들어놓고는 병원에 가기 싫다고 반항 아닌 반항을 하며 

삼 형제의 애간장을 태웠다. 



"더 아프면 그때 말할게. 그때 갈게" 

괜찮다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키고, 삼 형제가 떠나고 나서 그에게는 설명해야만 했다. 




"왜 대체 병원을 안 간 단거야.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병원은.. 그냥 가면 사람이 죽어 나올 것만 같아서 싫어"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병원에 대한 이미지는 그랬다. 

병원에 갈 때마다 쇠약해지는 엄마의 모습이 아직은 아른거려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런 나를 모르지 않았기에 그는 더 이상 내게 병원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곤 나는 이내 참았던 서러움을 왈칵 터뜨렸다.


"나는 아픈데, 막 너는 밥 먹으러 가고.. 밥이 맛있드냐?! 

내가 잘못했어도 그라믄 안되지. 나쁜놈이지" 

엉엉 울면서 투정을 부리는 내게 

"입맛 없어서 진짜 거의 다 남겼어. 나 많이 먹는 거 알지?" 

하고 웃어 보이며 묵묵히 받아줬다. 



결국 일행들은 먼저 떠나고 

리마는 다음날 저녁으로 미뤄졌다.


아팠던 탓에 개인실을 잡아 누워있는 내게로 안부인사 차, 작별인사를 하러 몇몇이 들렀다.



"언니 괜찮아? 나 화장실 좀 쓸게~" 

"괜찮아요? 와, 방 좋다~ 저 화장실 좀 써도 돼요?"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넉넉하지 않은 호스텔이었기에 

인사였는지, 화장실 이용이 급했던 건지 싶은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다음날 마주치는 한국인들 중 그 누구도 내 건강에 관심이 없던 건 

내가 쪽팔릴까 배려해준 거라고 생각하면 될까? 


아팠던 만큼 몸도 상하고, 실망한 만큼 속도 쓰리고 시렸다. 

사람에게 상처 받은 건 사람에게 치유받는다지만 

나는 매번 그 상처가 늘 아렸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해야지..' 

그렇게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를 써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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