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하고 또 비굴하게
말레이시아에서 버스를 타고 싱가포르로 넘어오는 일은,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정도의 일로 아주 쉽게쉽게쉽게 생각했던 별 대수롭지 않은 일정이었다.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 버스에서 잠시 내려 입국 심사 줄에 섰다.
입국심사 하다 버스를 놓친 기억도 있기에 최대한 줄이 짧은쪽을 잡아 섰다.
많지 않은 인원 수에 금방 통과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입국심사를 하던 그녀는 내 여권을 한참이나 뒤적거렸다.
여러 나라를 오간지라 각 국의 스템프들이 많았기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의심을 살만한 일일까 싶어 살짝 긴장 하고 있을 무렵
여권의 한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이건 뭐야?"
"아..그거.. 에콰도르 박물관 스템프야"
"아, 그래?"
별로 대수롭지 않게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넘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이제 도장을 찍어주려나 하고 있는 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곤 잠시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곤 나를 앞에 세워놓곤 본인은 간식타임에 들어섰다.
영문도 모른채로 마냥 멀뚱멀뚱 서서 10분정도 지났을까.
등 뒤로 줄 서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눈초리가 등에 따갑게 꽂히는듯 했다.
"어...무슨 문제라도 있는거야?"
행여나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스레 물었다.
"응? 아니야. 그냥 조금만 기다려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곤 이내 과자 한봉을 더 뜯었다.
뭐가 문제인거지??
여러나라를 돌아다는게 수상했나??
'입국거절'이라도 당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거지???
아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경찰한테 잡혀가는건 아니겠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해,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붙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웃으며 기다리란 대답과 과자 봉지소리 그리고 과자씹는 소리뿐이었다.
간식 먹을 시간이 필요해 나를 붙잡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려던 찰나
보안팀에서 친히 나를 데릴러 오고 있는 광경을 마주했다.
"쉣ㄷ"
진짜 나도 모르게 어디서 큰 잘못을 하고
어디선가 나를 수배중이었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정도로
공항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저기 따라가면 돼"
해맑게 가르키는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저기 갖은 일을 다 겪었지만 이렇게 따로 끌려가볼 일까지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따라가는 내내 넋이 나가 비틀거리며 따라 걸으며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나는 그저 여행객이에요. 억울해요' 라는 어필을 강력하게 하듯
씁쓸한듯 웃어보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보안실에 도착하니 나 이외의 다른 외국인들도 똑같이 끌려와(?) 있었다.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고 건내준 여권에 적힌 내 이름이 익숙치 않은듯 어눌한 발음으로 불려졌다.
마찬가지로 여권을 한참이나 뒤적거리다 이내 에콰도르 박물관 스템프에서 멈췄다.
'하..젠장'
속으로 나즈막히 '이거였네' 하고 탄식할 뿐 입밖으로 행여나 새어나가지 않게
입가는 어설픈 미소를 살짝 띄었다.
"이 도장은 뭐야?"
"아..그거..에콰도르 박물관 도장.."
큰 잘못하고 교무실 불려간 학생마냥 의기소침해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
어이없다는듯 실소를 터뜨리곤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기념 스템프를 왜 여기에 찍은거야?"
"어... 여행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 그래서 잘 몰랐어. 다들 여권에 찍길래 따라 찍었...."
"이런건 여권이 아니라, 니 노트에나 찍어야지"
"미안해, 이게 문제가 되는지 난 몰랐어"
마지막 말을 이곳에서 몇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노트에 찍으라는 말을 5번쯤 듣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고, 반성하고 얼마나 더 무슨 말을 해야 이들이 나를 입국시켜줄지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에 애꿎은 손톱만 잘근잘근 씹어댈뿐이었다.
"나는 이게 문제가 될지 전혀 알지 못했어..미안해."
그렇게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를 30분했을까
입국 수속을 기디라던 버스는 이미 떠났을 테고, 이제는 그냥 한숨만 길게 쏟아져 나왔다.
이대로 경찰서로 안끌려가면 다행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던 차에,
싱가폴 아웃티켓과 싱가폴 내에서 머무를 숙소 바우처를 요구했다.
금방이라도 울것 같던 얼굴이 반짝였다.
행여나 다시 마음이 바뀔까 싶어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급하게 아웃티켓과 바우처를 주섬주섬 꺼냈다.
"기념스탬프는 노트에나 찍어. 알겠어?"
'응, 지금 그 말까지하면 여섯번쨰야' 속으로 꾹 삼키고 겉으론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두번 다시 그러지 않을게"
"그리고..이번엔 보내주지만, 니가 만약 다시 싱가폴에 오려면, 이 여권이 아닌 새 여권을 발급받아서 와.
이 여권으론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어. 다신 오지 않을거야"
영어가 미숙한지라 다시 올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어야 할 말을 다신 오지 않을거야 라고 내뱉었던건
본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나를 보곤
그저 영어가 짧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러려니 넘기는 그들이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렇게 국경에서 약 45분만에 어렵사리 입국 도장을 받았다.
공항밖을 겨우 빠져나와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는 텅빈 버스정류장을 보고 있으니 울컥 하면서도,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외국인들과 함께 낙오되었음에 위안 삼는다.
"버스가 한시간 마다 있었으니까 그 다음 버스가 올거래, 기다려봐"
라고 버스회사에 친히 전화까지 걸었던 이 친구가 한 말을 듣곤
몇 시간을 정류장에서 기다렸지만 다른 회사의 버스들만 지나갈뿐 우리가 탔던 버스회사의 버스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