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에 튤립 구근 15개를 사다가 냉장고 깊숙이 넣어놓았다. 튤립은 한 계절 냉기를 견뎌내야만 꽃대를 만들어 올릴 힘을 비축한단다. 가을에 구근을 심어놓는 게 아니라면 냉장고 같은 데서 겨울을 나야 한다고. 씨앗의 기특한 성질은 내겐 계절을 넘기는 숙제 같았다. 전날 먹은 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마당에 나갔더니 날이 꽤 낭창하였다. 호미로 흙밭을 내리쳤더니 호미날이 푹 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봄이 왔구나.
캡슐커피를 하나 내려놓고 서둘러 밭일을 할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겨우내 마당 한 켠에 내놓아 색이 바랜 빨간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흙밭에 들어섰다. 작년에 한창 웃자랐던, 미처 뽑지 못한 고춧대 두어 개를 뽑고 낙엽이나 나뭇가지 같은 자질구레한 허드레를 치웠다.
5년째 월동하는 조선부추가 심긴 쪽은 흙이 수북이 쌓이고 정구지를 닮은 잡초가 여름마다 무성했다. 겨울을 이겨내고 올라온 봄부추나 가을에 피는 부추꽃이 아쉽지만 흙을 엎어 골라주었다. 큰 부추 뿌리가 세 덩이 정도가 나왔는데 뿌리가 탱글탱글하고 부추향이 가득했다.
얼추 땅을 고르고 나니 튤립이 뿌리내릴 곳을 골라야 했다. 제미나이에게 어디가 적지냐 물었더니 하루에 해가 대여섯 시간은 들어야 하고 배수가 잘되어야 한단다. 제미나이가 방금 답을 준 것도 머릿속에 남지 않고 튤립 구근 같이 귀하게 생긴 씨앗이 손에 익지도 않아 물었던 것을 재차 물어가며 자리를 보았다. 이내 휴대폰은 축축한 흙이 잔뜩 묻었다.
보통은 루꼴라를 심어 재미나게 따먹던 곳을 튤립에게 주기로 하였다. 이제껏 사본 중 가장 비싼 씨앗인데 북서향의 집에서 가장 해가 오래 드는 곳을 양보 못 할 이유가 있으랴. 몇 가지 모종을 심을 자리를 조금 남겨두고 너르게 자릴 잡아 분홍 튤립, 주황 튤립, 진분홍 튤립을 동그랗게 둘러 심었다. 그리고 못 쓰게 된 화분을 적당히 깨뜨려 튤립 심은 자리 표지로 삼았다.
무엇이든 심어놓고 마른 흙 위로 차가운 물을 뿌릴 때의 쾌감. 그것 때문에 작은 밭을 가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 녹기 시작한 땅이라 오래 물을 줄게 없었다. 다만 길고양이들 물릴 겸, 약간의 보온도 할 겸 솔잎이 잔뜩 붙은 나뭇가지를 올려두고 손을 씻었다.
조금 헤맨 것 치고는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다음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낯선 일을 몇 개 해치우고 나니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느낌이다. 고관절과 햄스트링에 뻐근하게 힘이 들어온다.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좋아질 것만 같다. 찻잔에 얼마 남지 않은 커피가 차게 식었다. 한 입에 들이키고는 바지와 신발에 잔뜩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