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강원도를 모함했는가

범부메밀국수 양양 한국

by 낮술

한여름 당일치기로 바닷가를 가는 일은 거를 수 없는 전통이 되었다. 내게는 믿음 없어도 설렌다는 크리스마스보다 더 두근대는 이벤트다. 때에 따라 한두 밤을 자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아침에 출발해 밤에 돌아온다. 운전을 하는 이가 무척 고단한 프로그램이지만 총합의 행복이 대개 크다 보니 이 공리주의적 일일여행은 별 무리 없이 매년 진행되고 있다.


옛날의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보아도 강원도에 이르고자 하면 굽이 굽이 안개 낀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었다. 마음을 먹고 떠나야 하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서울-양양 간 고속국도가 생긴 뒤 강원도로 가는 일은 무척 수월해졌다. 서울만 벗어나면 끝없이 이어진 직선도로와 터널의 연속, 그것의 지루함을 조금만 견딘다면 서늘한 미인형의 동해바다를 만날 수 있다.


양양의 어느 조용한 바닷가


동해바다는 서늘하게 잘생겼다. 무엇보다 서늘하다는 촉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설악산의 웅장한 능선이 달리기를 멈춘 땅 끝에 길게 늘어선 백사장들, 그저 푸르다는 단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검푸른 바닷물의 낯빛. 그래서인지 매년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보고 또 보고 싶다.


되는 대로 해변가에 자릴 잡고 짊어지고 먹고 마실 것들을 펼쳐놓고 해가 질 때까지 물놀이를 한다. 역시나 먹을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 되는데 이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재미가 있어졌다. 처음엔 편의점에서 과자나 김밥 정도나 사 먹던 것이 지금은 꽤나 체계를 갖추며 진화를 하였다. 쿨러가 기본이 되었고, 파라솔에 이어서 전문 캠핑 브랜드의 타프가 참여한다. 캔맥주 정도에서 와인이나 위스키, 데킬라, 리큐르를 갖추기도 한다. 닭강정, 순대, 물회, 오징어순대 등 시장통의 명물을 찾는데서 새벽부터 김밥을 말아서 가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집 앞 텃밭에서 기른 루꼴라로 맛을 낸 김밥.


해가 중천에 뜬 동안 이루어진 식도락의 경주는 저녁놀이 어슴푸레 피어오르면 프로그램의 절정에 이른다. 붉게 그을린 피부를 부여잡고 차가운 소주로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마지막 의식. 바닷가 근처의 먹고 마실 곳을 찾아가는 일이 바로 그 의식이다.


나는 마치 수완 좋은 제사장이나 된 것처럼 여행의 동반자들에게 의식을 집전해왔다. 그럼 지난 의식들은 어떠했는가. 고성터미널 옆 정갈한 돼지갈빗집, 양양군청 앞 섭집, 자연산 물고기가 달큼한 속초중앙시장의 횟집, 아는 사람만 안다는 고성의 물회집, 양양전통시장 안 감자옹심이집, 강릉의 이름 높은 짬뽕집이라거나 시내 모처의 화상집 등은 모두의 기억에 남을만한 세리모니였을 것이다.


그럼 이번 여행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신앙을 더욱 고취시켜 줄 이번 예배당은 어디인가. 바로 양양 후천이 흐르고 고인돌 유적이 있는 범부리 마을에 소담하게 내려앉은 메밀국숫집이다.


깨끗하게 잘 차려진 식당에 정갈한 메뉴 구성이 자리에 앉기 전부터 경건하다. 물과 비빔을 섞어 주문하고 수육에 촌두부, 소주를 시킨다. 상차림은 단출하게 밑반찬 두 종. 열무김치가 벌써 소주 뚜껑을 열게 만든다. 먼저 등장하는 건 촌두부. 소주 돌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담백한 두부가 별미다.


첫 메뉴에 이어서 국수들이 등장한다. 메밀국수는 물과 비빔이다. 식당도 주방도 꽤 큰 집이지만 국수가 나오는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다. 이 집과 단박에 사랑에 빠졌던 건 꺼끌 하고 담백한 메밀면. 입안에서 바로 흩어져 버리면서 메밀 자체가 느껴지는 면이다. 세련된 제면의 쫄깃한 면도 좋지만 끊어 먹을 것도 없는 메밀국수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물메밀국수는 육수에 참기름과 김으로 맛을 내었고 비빔메밀국수는 새콤달콤한 다대기 양념을 올려 나온다. 둘 중에 고민할 것 없이 둘을 시켜 번갈아 먹으면 된다. 면으로 끝나는 건 아쉬워 수육과 만두까지 시켜본다. (만두는 아쉽게도 사진이 없지만) 기름 곱게 바른 수육과 메밀피로 빚은 만두까지 갖추어 제법 면옥의 위상을 갖춘다.



한낮에 태양열이 아직 식지 않은 것인지 술 먹고 나는 열인지 알 수 없을 때면 저녁놀이 한창이다. 너무 늦지 않은 밤에 서울에 당도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나는 또 차 뒷좌석에서 코를 골며 곯아떨어질 것이다. 오늘은 꿈에서라도 외울 것이다 - 누가 강원도를 맛없는 고장이라 했는가, 누가 강원도를 모함했는가. 내가 대신 강변하여 줄 것이다.


양양의 남대천




작가의 이전글소울푸드 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