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저항
대표 이미지 : 영화 <The Stranger> / 감독 Orson Welles, 출처: http://journeysinclassicfilm.com/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부조리 주의라는 철학을 알리는데 일조했다. 카뮈는 그가 쓴 에세이 <The Rebel>에서, 그의 삶 전체를 개인주의적 자유 속 깊숙이 숨어있는 허무주의와 맞서는데 소요했다고 묘사한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카뮈는 실존주의자 중 한 명, 심지어 평생을 실존주의자로 구분되었으나 자기 자신은 실존주의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1945년 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이념 단체와의 관계를 거부했다. "아뇨, 전 실존주의자가 아닙니다. 샤르트르와 저는 우리가 항상 함께 거론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카뮈는 프랑스 이민자 가족으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알제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1936년에 졸업했다. 카뮈는 구 소련과 미국 양 국가에 기반한 두 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한 국제적 교류 집단을 설립했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이기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를 선고받는다.
-미국판 서문 中
<이방인>의 첫 느낌은 낯섬이다. 카뮈는 모든 풍경을 낯설게 표현하는 재주를 가진 것 같다. 또는 그만큼 하루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가 보는 매일 하루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다르게는 '부조리'시리즈의 첫 작품이기에. 모든 일상적 풍경들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을까? 일상이 일상이기를 거부하면, 나의 하루에는 어떤 풍경이 가능할까?
오늘 하루가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것이 나라는 사람이고.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산다면. 좀 더 만족스러운 내가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글쎄... 말로는 뭘 못할까 싶다. 믿으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단다. 성실한 삶은 보답받는다고 한다.... 글쎄... 세상은 생각보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물론 내가 염세적인 성향을 가진 것도. 세상을 비꼬듯이 쳐다보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진 않는다. 선함의 반대가 오로지 악은 아니듯이. 부정의 총 합이 비극을 의미하진 않는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때로는 그런 부분이 나의 삶을 꽤 고달프게는 하지만. 뭐 매일같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어쩐지 엄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다름이 없는 듯한 상태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만사가 공인된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렛 미인'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클로이 모레츠라는 이쁜 아역배우?(지금은 여배우로 포풍 성장 중이다)가 나오는데. 아 물론 책도 좋아한다. 내 글을 뒤져보거나. 책방골목 시. 소설 부분을 뒤지다 보면. 내가 쓴 서평이 있을 것이다. 뭐 여하튼. 영화를 보다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소년이 소녀에게 사귀자고 한다. 소녀는 거절하고, 소년은 삐쳐서 획 돌아선다. 소녀는 한 굼을 푹 쉬면서. 우리가 사귀면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물어본다. 소년, 생각한다. 그리고 없다고 이야기한다. 소녀는 그러면 우리 사귀자고 이야기한다.
뭐 나 또한 딱히 이 소년과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관계 그 자체보다, 어느 순간에 관계에 붙여진 이름이 더 중요한 순간이, 분명히 나에게도 존재했으니까. 지금은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보통은 썸도 아니고, 사귀는 것도 아니고, 미묘한 감정만 오가다 놓쳐버린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죽음이라는 것도 누군가가 정확히 명시해 주거나, <장례식>이라는 절차가 없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갈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이 그런 것을 두고 후회하거나, 아쉬움을 느끼진 않을 테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항상 나의 상태를 정의하고, 관계를 정의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것을 참지 못하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명료해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
이제는 영화 속의 상투적인 한 장면인. "어머님은?" "작년에 일 하시다가 그만..." "아! 이런 유감입니다" 같은 장면은 사라지고. "00 씨. 아버지는 살아 계시고. 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군요" 같은 장면이 더 익숙해지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간에, 흘러갈 것은 흘러가고, 변할 것은 변하고, 이름과 관계없이 자기의 자리를 찾아간다. 오래된 연인이 '결혼'으로 이름을 바꿔봐야 얼마 못 가듯이 말이다. 뭐 잘 흘러간다면, 어떤 위기가 와도 잘 흘러갈 것이다. 이름이란 것은 일단 붙여지면, 설령 그것이 잘 못 지어진 이름이라도, 그렇게 될 것처럼 끌어가는 힘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타고 잘 흘러가는 관계도 있지만... 대게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뭐 잘만 활용한다면 이름처럼 강력한 도구도 없지만...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든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얻는 데서 맛보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검사의 변론이 나에게는 곧 따분하게 느껴졌다. 나의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장광설, 그러한 것들 뿐이었다.
나를 어이없게 만든 말 중 하나는. "그래. 나도 니 나이쯤엔 그렇게 생각했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고나 사유라는 것은 항상 일정한 형태가 있으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당연히 획득되어져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글쎄, <면도칼>이라는 소설에서는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날카롭고 냉정하게 늙은이들을 평가한다"라는 이야기처럼, 내가 봤을 때, 나잇값 못하는 어른들은 생각보다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어른들도 많다. 둘 다 많다.
그 사람이 가지는 어떤 성향이나 생각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맞닥뜨린 어떤 순간이나 사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느껴진 감정이 기반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과 사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니 나이 때에는 말이지..."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면, 뭐랄까, 연민이랄까? 그런 게 생겨난다.
보통 후배들에게 사람을 많이 만나거나, 책을 많이 읽거나, 둘 중 하나는 하라고 하는데. 굳이 선택하자면 사람을 많이 만나보라고 추천한다. 대충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책을 많이 읽어서 매력적인 인간보다, 사람을 많이 만나서 매력적인 인간이 많았던 점을 기억해보면, 나도 결국엔 내 경험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는가 싶기도 하다. 물론 베스트는 사람도 만나면서, 책도 읽는 것이지만, 뭐든 둘 다 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여하튼 뭐 사고나 생각이라는 것이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란 것만 이해해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기 힘들 텐데... 오래 살아서 경험이 많다는 것은... 뭐랄까... 내가 너 보단 직장 생활을 몇 년 더했으니, 너보단 돈을 많이 모았어... 같은 느낌이다. 사실 상대방이 대기업 임원의 아들이라면, 내가 모아 둔 돈이 돈으로나 보일까?
뭐 상대적인 것 아닐까? 우리나라 gdp가 2만 불을 넘어간다고 해서, 누구나 2만 불을 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단편적이라는 것은. 이런 대충 크고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르겠다. 순간에 집중하고, 장면에 집중한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흥미가 생기는 것을 바라본다. 이런 것들이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관례에 대한 반발? 선입견에 대한 반발? 뭐 그런 것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살지만. 뭐 항상 결론은 그렇다.
내 한 몸이나 잘 사리면 될 것을...
천하란 중대한 물건이지만, 그것으로 생명을 바꿀 수는 없으니. 이것이 도를 지닌 자가 속인과 다른 점이다.
-장자
오슨 웰스의 영화 <The stranger>와 카뮈의 소설 <The stranger>는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 왜 영화 이미지를 걸어놨을까?
생각해보면
이거야 말로 부조리이지 않을까?
흠, 말장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