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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Apr 04. 2016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by Dostoyevsky

그의 소설은 왜 고전이 되었는가?

대표 이미지 : 연극 <The brothers Karamazov>, LookingGlass극단.

출처: http://lookingglasstheatre.org/




Fyodor Dostoyevsky

설명이 필요한가?



설명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명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톨스토이가 큰 산인 줄 알았는데, 조금 물러나서 보니 그 뒤에 아스라하게 뻗어있는 거대한 산맥은 도스토옙스키였다. 

by 앙드레 지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by 지그문트 프로이트



물론 개인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Prologue


The Brothers Karamazov(1958) / directed by Richard Brooks, 그리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던거 같다.




아직도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리가 한 번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신과 악마, 

선과 악, 

성과 속, 

구원과 타락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부터 '타락'하게 되었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점에서 주인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얄료샤(알렉세이 표드로 비치)'는 재미없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스스로를 구원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알료샤'의 형제들과 그 주변 인물들 때문일 것입니다.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기에 등장인물도 많습니다. (아 그리고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은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한 2부의 프롤로그 격의 소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음으로서 유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하더군요. 2부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러시아 황제를 죽이고 혁명을 일으킨다는 스토리로 초안을 짰다고 합니다.) 맏형인 '미챠'와 둘째 형 '이반' 그리고 그들의 연인인 '그루 쉔 카'와 '카챠', 그리고 서자인 '스무 로프'까지. 각자 자신을 '타락'으로 이끄는 성격적인, 인격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를 얻으려 하기도 하고, 끝없는 구렁텅이에 질척거리기도 합니다.


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사실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이 하는 고민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티리콘> 같은 인류 최초의 소설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와 같은 비교적 근대의 소설도, 현대에서 유행하는 소설들을 읽어봐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통이나 고뇌가 만들어내는 질문은 똑같은 게 아닐까요? 다만 시대에 따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가, 고전과 비고전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더 특별한 문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주제 - 또는 소재 - 의 넓은 스펙트럼일 것입니다.




구원의 

관념과 실천에 대하여


... 인류를 사랑하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놀라곤 한다고 말하더군요.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몽상 속에서는 인류에 대한 열정적인 봉사를 생각하기에 이르고 갑자기 어떤 식으로든 요구가 있을 시엔 어쩌면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가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고 말하더군요. 상대방이 자기 곁에 있을라치면 곧 그라는 사람 자체가 자기의 잦존심을 억누르고 자유를 밀어낸답니다. 꼬박 이십사 시간 동안이면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증오하게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는 너무 오랫동안 식사를 하니까, 다른 누구는 콧물감기에 걸려 끊임없이 코를 푸니까 말이죠.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곧 그들의 적이 된답니다.

대신, 개별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게 될수록 언제나 인류 전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더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2장, 불건전한 모임 中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타나는 스펙트럼을 보여드리기 위해서는, 여러 장면을 보여드리는 것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이 대목이 나오는 장면은, 신을 믿지 못하는 어떤 여성이 '알료샤'의 스승을 찾아 신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에 스승은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순간에, 신을 보게 될 것이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이 이 거대한 드라마에 대한 해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 사랑은 위대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사랑은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랑을 갈망하는 시대라고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멜론 top 100을 가득 채운 사랑 노래는, 현실 속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한병철 씨는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스승과 신을 믿지 않는 여성의 차이는 어디서 나타나는 걸까요?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관념과 실재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 구원은 보지도, 체험하지 못한 관념이지만, 스승에게 구원은 실재적인 과제입니다.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알로샤에게 가르치는 것도 그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가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차이는 아님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차이는 실행의 유무가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요.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추천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관념적으로 아는 것과 직접 느끼는 것은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서 큰 차이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 차이가 어떻게 발현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하는 주제와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사실 발현이라는 평생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가능성이겠지요. 다만 0%와 1%는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정확하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뭐 여하튼, 바로 옆의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이 일종의 자기기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관념'이나 '생각'만으로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때 우리는 큰 오류를 저지르게 됩니다. '김정일 개새끼 해봐'라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념을 구분하려는 시도 같은 것들 말이지요. 뭐, 어쩌면 그들은 말에서,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의지와 사상을 감별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지몽매해서, 말만으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없겠더군요.




치욕과 자존감으로 드러나는

인간성 Humanity


내가 받은 치욕의 대가로 당신네들한테 돈을 받는다면, 우리 아이한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뒤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알료샤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 사람은 자기가 수표를 짓뭉개서 집어던질 줄은 몰랐으리라, 이미 달리기 시작한 사람은 한 번도 몸을 돌리지 않았고, 알료샤는 그가 다시는 몸을 돌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를 쫓아가 불러 세우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4장, 파열들 中


인간이 자기 자신도 인간임을 증명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중 중요한 한 가지는 '자존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위의 장면은 '알료샤'가, '미챠'에게 치욕스러운 대접을 받은 '스네기로프'를 찾아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의미에서 돈을 건네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을 받지 못하는데, 그의 아들인 '일류샤'가 친구들에게서 아버지를 변호하다가 따돌림을 받고 상처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차마 그 조차 그 돈을 거부할지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알료샤'가 건네는 돈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아들의 상처가 더 중요하고, 자신의 명예가 중요하기에, 그는 차마 이 돈을 받지 못합니다.


물론 '알료샤'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가 돈을 거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자신을 책망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돈을 거절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비록 일하지 않고 러시아 정부의 지원금만 타 먹는 불한당 같은 이라도, 아내와 딸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인물이라도 말이죠.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소설 속에서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모두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류샤'의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리마조프'는 굉장히 악덕하고, 비열한 인물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오기를 바라는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형인 '미챠'는 굉장히 문란하고 절제가 없지만, 스스로에게 진실한 삶을 산다고 자부합니다. 재판 속에서 검사는 한 평생을 그럭저럭 살았더라도, '미챠'의 재판에서 만큼은 그 어떤 유능한 검사 부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인물들의 묘사들이. 좀 더 우리를 닮아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개별적인 인간은 '착하다' '나쁘다' '유식하다' '매력적이다'와 같이 한 단어로 묘사할 수 없듯이. 하나의 인간을 '선'으로만 채울 수 없듯이. 한없이 귀족적인 인물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한없이 천한 인물을 성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친구, 연인 또는 부모가 한없이 사랑스럽다가도, 경멸하고 싫어지는 순간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내면에 모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캐릭터에 잘 반영함으로써, 인간성 Humanity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신神에 

대하여


특히 신에 관해서는 더 그래, 신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그저 3차원에 관한 개념만을 갖도록 창조된 머리에는 전혀 맞지 않는 질문들이야. 그래서 나는 신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덧붙여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길 없는 신의 현명함과 신의 목적도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결합시켜 줄 영원한 조화를 믿고, 또한 우주의 지향점이자 그 자체로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그 자체로 곧 하느님이신 말씀을 믿고, 뭐 등등, 겸사겸사 무한성도 믿는다.

… 즉, 고통이란 것도 결국엔 아물어 사라지게 마련임을, 인간들의 모순들이 빚어내는 모욕적인 희극도 전부 애처로운 신기루처럼, 또 원자와 같이 부실하고 미미한 인간의 유클리드적 머리가 만들어 내는 추악한 허상처럼 사라져 버릴 것임을, 끝으로, 이 세계의 피날레에 이르러 영원한 조화의 순간에 뭔가 너무도 귀중한 것이 문득 출현하여 모든 마음들이 그것으로 충만하고 모든 분노가 사그라지고 사람들의 모든 악행들과 그들이 흘린 모든 피가 그로써 충분히 보상될 것임을, 사람들이 겪었던 모든 일을 용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조차도 충분히 가능해질 것임을 나는 갓난애처럼 확신하고 있어.

-5장, pro와 contra 中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의 '이반'이 말하는 신에 대한 대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신론자가 믿는 '신'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이반'이 '일류샤'에게 자신이 지은 소설을 이야기하는 부분 또한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이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고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대목으로도 읽힐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대심문관은 입을 다물었을 때, 자신의 죄수가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해 주길 얼마 동안 기다리지.

그는 상대방의 침묵이 괴로웠어.
그는 수인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줄곧 무슨 반박을 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는 듯 그의 말을 조용히 꿰뚫듯 듣고 있는 것을 보았지.
노인은 상대방이 씁쓸하고 무서운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좀 해 주었으면 싶었어.

하지만 그는 갑자기 말없이 노인에게로 다가와, 아흔 살 먹은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 거야.

자, 바로 이게 대답의 전부야.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지. 그의 입술의 양 끝이 어쩐지 파르르 떨렸어.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그에게 말해.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라고, 그러고는 그를 ‘도시의 어두운 광장’으로 풀어주는 거야. 죄수는 그렇게 떠나가.

- 5장 pro와 contra 중


이반이 쓴 소설에 대해서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명망 있는 한 대심문관 앞에 진짜 '구도자'가 나타나, 죽어버린 한 소녀를 살려냅니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그가 '구도자'임을 알아보고, 당장 그를 감옥에 가두고는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왜 인류에게 크나큰 자유를 주었는지, 자유에 대한 권리만 주고 의무는 주지 않은 건지, 이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강한 자는 그렇다 쳐도, 약한 자에게 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운 건지. 대심문관은 성토하듯, 또는 따지듯이 '구도자'에게 이야기하며,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대중들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구도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위의 대목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답이 사랑 Love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대답 Answer을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답을 항상 언어의 측면에서 생각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담함은, 그것을 언어라는, 소통에 있어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질문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섭습니다. 우리가 A냐? B냐?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의 사고는 A와 B로 한정되어 버립니다. 이 질문에서 벗어나서 다른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자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도 알아야 하며, 질문자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틀에 갇히지 않는 넓은 시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도자' 그리고 '신', 또는 불교에서 스스로 부처가 된 사람만이 풀 수 있다는 '화두' 또한 질문이 가리키는 지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을 때,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보다 더 초월적인 종교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또는 그는 신 God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겠지요.




성스러운 자의 

상스러운 

죽음


그는 의로운 이들 중에서도 가장 의로운 분이 그분보다 그토록 미천한 자리에 서 있는 경솔한 군중으로부터 그토록 냉소적이고 표독스러운 조롱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모욕감을 느꼈고 심지어 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설령 기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어떤 기적적인 현상도 나타나지 않고 기대했던 것이 즉시 증명되지는 않을지라도, 도대체 이 불명예는 무엇 때문이며, 이렇게 묵과된 치욕은 또 무엇 때문이며, 표독스러운 수도사의 말대로 ‘자연을 초월한’ 이 급속한 부폐는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7장 알료샤 中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 속에서 다양한 대립항을 가지고 인물을 표현합니다. 소설 속 일관적으로 초월적인 모습을 보여준 '알료샤'의 스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속의 많은 신자들은 위대한 스승의 죽음을 목도하기 위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신'과 접촉한 위대한 스승의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아니라 향기가 난다는 이상한 낭설을 주서 들어, 그것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스승이라고 해봐야 '인간'에 불과한 그의 시신에서는, 여지없이 악취가 풍겨져 나오고. 신자들은 위대한 스승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알료샤'는 멘붕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스승이 죽기 전, 그는 러시아 민중만이 희망이고 항상 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읽다 보면, 과연 이들이 희망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신자들은 진리나 스승의 가르침보다 미신이나 풍문을 더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미신과 풍문이 더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더 열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러한 자극적인 이슈를 좋아하는 민중의 모습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미챠'가 '존속살해'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자 그의 연인 '그루쉔카'는 사람들은 '존속살해'라는 이슈를 파렴치하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이런 사건이 좀 더 많아지길 원하고 있다며, 자신도 이러한 충격적 스캔들을 원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아마 신자들은 스승의 존재를 경 외시 하여,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해주길 바란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도달하기 힘든 높은 수행의 경지에 오른 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아무리 위대한 스승인들 '인간'일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인간'이기 때문에 더 고귀했음을 모르는 모습에, 과연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에 

대하여


거보십시오, 다들, 다들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들이라는 말이 뭐든 의미를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9장, 예심 中


'미챠'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오르게 됩니다. 피의자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가 불충분하고, 피고자도 피의자의 범행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 하지만 '미챠'는 범행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파블로 표드르비치'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자, 범인으로 '미챠'를 지목합니다. 많은 증인들이 그의 유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도 말이죠. 그 누구도 범행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으로든 결론은 같아집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타진요'의 왓비컴즈가 떠올랐습니다. 타블로의 말처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거 같네요. 


아마 증인들 중 '미챠'를 제대로 본 사람이 있다면, 이 허세로 가득 찬 사내를,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닐지언정, 실제로는 죽이지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하나같이, '미챠'라는 한 사내가 그럴만한 사내인 지보다, '미챠'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는 것에 집중합니다. 


앞서 '존속살해'를 혐오스러워 하지만, 이러한 스캔들을 원하다는 그루쉔카의 솔직한 고백처럼. 그들 또한 혐오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없던 호랑이를 만들듯이. 그들은 '존속 살해자'를 만들어 버립니다.





악마惡魔에 

대하여


바로, 한 명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수천 명을 파멸시키는 것이지.

예를 들어, 그 옛날 옛적 나를 그토록 골탕 먹인 단 한 명의 의인 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을 파멸시키고 또 얼마나 많은 명예로운 평판들을 치욕스럽게 만들었던가!

그래,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나에게는 두 개의 진리가 존재하는 셈이야. 하나는 저 세계의 것, 저쪽의 것으로서 아직은 내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진리이고, 다른 것은 나 자신의 진리이지.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순수한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거야…

11장, 이반 中


우리가 악마를 떠올린다면, 머리에 뿔을 달고, 뾰족한 꼬리를 가진 인간형태를 가진 생명체?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마는 좀 더 리얼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이반의 논리적 허점을 치밀하게 파고들죠. 악마는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합니다. 그 안에 어떤 것이 기만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각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곤 해도, 이 대목에서 악마가 하는 말은 심상치 않습니다. 악마라고 하기엔 너무나 '신'에 가까운 대답을 합니다.


앞서 이반은 '인간'이 '신'을 닮도록 만들어졌다면, '악마'는 '인간'을 닮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반에게만 보이는 이 악마는, 이런 이반의 생각에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반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악마를 보게 하고,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 악마를 만들어냅니다.


'이솝우화'에서는 사람임에 불구하고도, 금수의 탈을 쓴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조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솝우화의 거의 끝부분에 나오는데요,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앞에서 나온 수많은 동물들이 사실 사람을 지칭하고 있고, 인간이 가지는 내면을 동물로 형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반이 말하는 '악마' 또한 이솝우화의 동물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구원에 

대하여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훌륭한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덕분에 언젠가는 구원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될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훗날 악한 사람이 될지도, 심지어 고약한 고약한 행동 앞에서 버텨 낼 힘을 잃을지도, 인간의 눈물을 조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아까 콜랴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고통받고 싶다.’라고 외치긴 했지만 -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한 표독스러운 조롱을 퍼붓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질지라도, 우리가 일류 샤를 어떻게 땅에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예기를 나누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설령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이 순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에필로그 中


결국 '미챠'는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알료샤'는 형의 무죄를 확신하고, 형을 빼돌려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병을 앓던 '알료샤'의 작은 친구 '일류샤'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알료샤'는 그의 어린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그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다만 그것은 인류나, 민중, 국가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한 친구를 사랑한 기억. 그를 소중하게 대했던 기억이. 결국 그 자신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가 사악한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때만큼은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Epilogue



사실 제가 언급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스메르쟈'의 비열함이나, '그루쉔카'와 '카챠'의 질투, '알료샤'와 '리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등등 흥미로운 이야기 아주 많습니다. 다만 이것들을 다 옮겨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은. 재미있게는 읽었지만, 인상 깊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제가 소개드린 부분이 인상 깊은 분들이 있다면, 그 외에 부분에서 감동을 느끼는 분들 또한 존재하실 거라 생각하기에. 한 번 읽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다만. <지하 생활자의 수기>나 <죄와 벌>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생각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재미없고 지루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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