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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Mar 28. 2016

Peripheral Thinking(~16.03.27)

주변적 고찰 /  William Kentridge



William Kentridge (born 28 April 1955 ~ )


윌리엄 캔트리지는 애니메이션 필름, 그림, 인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 아티스트이다.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매체 - 인쇄물, 그림, 판화 등 - 을 영상화한다. 영상 안의 작품들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변화한다.  2와 1/4초마다 변화하는 그림을 꼼꼼히 배치하여 한 장의 그림은 영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변화하고 영화화된다. 그는 이러한 작업 방식을 통해서 그림이 가지는 다층적 의미를 예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 그는 제 3의 목격자라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모님은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예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피해자들의 변호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남아프리카의 사회 정치적 상황과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데, 프란시스코 고야나 케이스 콜위츠와 같은 예술가들과 매우 유사하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반도 전쟁 -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 나폴레옹과의 전쟁 - 을, 콜위츠는 독일 직공과 농민 전쟁을 경험하였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켄 트리지는 표현주의적 성향을 비치는데, 내용이 형식을 드러내기도 또는 그 역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업의 전체적인 의미 구조 안에서 색과 구성, 미디어를 조작함으로써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주제과 서사를 동등한 위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의 작업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켄트리지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거칠고 표현주의적인 측면들이 관람자로 하여금 칙칙하고 어두운, 불편한 상황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Casspirs Full of love

남아프리카에서 다년간 발생하는 사회적 불평등의 양상들이 작품의 양분이 된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Casspirs Full of Love>는 평범한 관람자가 보기엔 박스 안에 머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인들은 그것이 Casspir가 군중을 제어하기 위한 전차로서 폭동을 제압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인쇄물의 측면을 따라 쓰인 <Casspirs Full of Love>라는 제목은 모순의 서사를 제시하고 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카스피어는 행복을 터트리는 폭탄과 같다. 이 기계의 목적은 무력으로 평화를 새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켄트리지는 식민지의 무력과 부를 갈취함으로써 하층 토착민을 도구로서 사용하려는 사실에 집중한다. 












전시 소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와 사회를 담은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윌리엄 켄트리지(1955년생)의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인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William Kentridge: Peripheral Thinking》전이 12월 1일부터 2016년 3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제2~4 전시실 및 복도 공간에서 개최된다. 인종 간의 차별과 봉기로 어지러운 요하네스버그에서 인권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켄트리지는 철학, 음악, 영화, 물리학, 미술, 무대미술 등 다방면에 걸친 깊은 이해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장르가 융합된 다층적인 예술세계를 선보인다. 켄트리지의 강연 퍼포먼스의 제목에서 따온 전시명 ‘주변적 고찰’은 중심에서 개진되는 논리적 사고의 전개가 아니라, 논리적 연관관계를 갖지 않지만, 한 주제에서 자유롭게 연상되거나 확장되어나가는 사고의 흐름을 뜻한다. 마치 나무의 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듯, 주제에 대한 우리의 사고도 단선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지점에서 다른 각도로 확장되어간다.


출처: MMCA.GO.KR




때로는 환경이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닌가

싶다



예술가, 건축가, 문학, 영화, 건축 등에 대한 많은 글을 읽다 보면 어김없이 '작가'의 작품 활동과 살아온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물론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철학이나 스타일이 존재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 왔는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가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이나 특수한 환경을 바라보게 된다.


어찌 보면 그가 '예술가'이기 때문에 특수한 시대적 배경이 평범한 개인적 배경보다 주목받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유명한 예술가였다면, 누군가는 80-10년대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소외받는 20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그런 식으로 묘사되지 않았을까?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교육을 받아, 평범하게 사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뭐 예술가가 살아온 시대라는 건 어쩌면 그 자신에게도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삶의 다른 부분이 더 중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개인적으로 예술이라는 건 어쩌면, 보이는 데로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알려고 하면 질문해야 하고, 질문하려 하면 현재를 유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보고, 질문하고, 읽고, 듣고, 생각하고 다시 본다. 어느 한 부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고, 모든 것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런 부분에서 윌리엄 켄트리지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라는 이미지와 굉장히 유사한 사람이다.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서,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지저분하다고? 솔직히 이렇게 사는 것 아닌가?





그의 작품은

온전한 하나의 작품이기보다

작품이 가지는 하나의 양상에

가깝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가장 독특하다고 생각한 점은, 모든 작품들이 어느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이미지들이 영상의 일부분을 장식하기도 하고, 독립되어 있기도 하다. 영상의 일부분은 그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서사의 한 양상으로, 독립되어 있는 작품들은 의미적인 외연에서 연결된다. 어쩌면 한 작가 또는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수시로 변해가는 이미지를 캐치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의 작업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켄트리지는 주로 목탄 드로잉을 기본으로 작업을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머리에 떠도는 감정을 가장 빠르게 옮길 수 있는 재료가 목탄'이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이 이미지화되고, 그 위에 현실의 상징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의미의 다층화와 잔인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층화 된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변화함으로써 영상화된다. 


인간이 인지하고 있는 실제 세계도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뭐, 하루를 되돌아보는 것은 하루 전체를 비디오를 다시 감아서 틀어보는 것과 다르게, 내가 인지하는 나의 하루는 결국엔 상징적 이미지와 이미지 간의 관계 - 문맥에 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전시장이 사람의 머릿속과 닮아서 좋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거쳐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깔끔하게 정리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Epilogue


전시 리뷰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느낀 감상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시 후에 그 작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을 때, 그 감상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보를 얻으려면, 전시장의 팸플릿이 훨씬 더 양질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솔직히 팸플릿에 쓰인 글들을 보면서, 큐레이터 분이 정말 깔끔하게 작가에 대한 정보를 잘 정리해 놓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 해설이 중요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사유의 영역을 넓혀나간다라는 느낌으로 글을 적고 있다. 가이드 리뷰라기엔 거창하고, 그리고 전시도 이미 끝났지만... 그리고 저작권에 걸리지 않나? 생각도 들지만...


여하튼 무엇인가 남기는 행위는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사유든, 단상이든.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람객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예술가의 작업실이 머릿속을 확장한 곳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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