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한병철이 읽는 디지털 풍경의 긍정성과 투명성
건축, 철학, 전시, 영화 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건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와중에 새로운 시도들 또한 재미있게 볼 수 있고. 현재 우리의 시대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세월이 흘러서 2-30년 후에는 지금을 정의할 수 있는 또 다른 개념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재미있을 거라 생각한다.
전작인 <피로사회>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면역학-비 면역학적 시대를 구분하는 그의 철학 (물론 그것이 노마디즘의 변형으로 읽힐 수 있지만) 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얇은 책을 읽는 데에는 솔직히 하루면 넉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로사회처럼 술술 넘어가지 않는다. 왜일까?
개인적으로 <투명사회>의 리뷰는 좀 더 호흡이 긴 문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글들이 짧은 호흡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설명과 생각의 흐름을 자유롭게 펼쳐놓으려는 의도가 많이 배어 있다.
물론, 매우 재미없고 지루한 글이 될 것이다.
그래도 뭐, 혹시나 나처럼 재미없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써보기로 한다.
(글쓴이의 정확한 워딩과 다른 저자의 고유한 사상, 개념어는 굵은 글씨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
한병철 씨의 글쓰기는, 뭐랄까, 지도를 만드는 것과 같다. 건축 이론가 케빈 린치에 따르면. 도시는 5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Path통로, Edge연변, District구역, Node절점, Landmark랜드마크,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있다. 사실 도시라기보단 도시가 가지는 이미지. 도시 이미지의 구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해보자면. 도시는 도로와 블록과 해변이나 강 같은 자연요소와 지역의 중심이 되는 유명한 건물과 사람들과 운송수단의 교차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이 다르게 조합됨으로써 각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다.
한병철 씨의 글쓰기를 도시와 비교하는 것은, '그의 글들이 굉장히 구축적이다.'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사상가들을 인용한다. 블록을 깔아 두듯이 그리고 그들의 사유를 통과하는 길을 만들고 접점을 만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상가와 부가적인 사상가의 위계를 만든다. 그렇게 그는 피로사회와는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글을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현실이라는 배경 속에서 완성된다.
대충 이야기를 풀어나갈 시작점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의 글의 구조가 어떤지 살펴보았으니. 이제 큰 그림에서 작은 그림으로 천천히 시야를 좁혀가며,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지금 사회의 현실일 것이다. 수많은 현상들이 우리 도처에 존재하겠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디지털 문화와 긍정의 문화이다.
<투명사회>는 <피로사회>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은, 지금은 면역학적 시대가 지나고 비 면역학적 시대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면역학적 시대에 이물질. 타자는 경계의 대상이고 필요하다면 제거되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우리의 언어에 '이방인'과 '텃새'라는 단어의 존재로 확인할 수 있듯, 그룹 또는 국가 또는 민족에게 배타성과 함께 전통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집단 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듦으로써,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다른 집단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낸다. 일찍이 레비스트로스란 작자는 이러한 문화의 형성에는 일정한 구조. 법칙이 있을 것이라며, [슬픈 열대]라는 저서를 통해 '문화 인류학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가져간다.
하지만, 21세기 지금은 비 면역학적 시대이다. 우리는 더 이상 타자를 배척하지 않는다. '타자' 또는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담긴 부정성을 제거한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나 - 또는 우리 집단 - 에 해가 되는 존재.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기엔 도시라는 공간은. 너무나 많은 '타자'과 '이방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전통과 같은 문화적 요소는 약해진다. 당연하지 않은가? 전통이라는 것은 공유하는 집단이 있어야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환경은 그것을 거부한다. 이제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라지고 '개인'이 존재한다. 과거 마을이라는 삶의 환경은 '우리'라는 연대감을 만들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밖에 나가면 전부 어머니의 친구, 아버지의 친구, 할아버지 친구의 손자, 삼촌 친구 등등등... 나와 연결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장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도시인의 삶에서 '우리'를 형성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우리'라는 연대감을 유지하는 것도 피곤하고, '우리'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 이들을 하나하나 거르려면 평생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오히려 이방인이 가지고 있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것이 인지적 측면에서 간단하다. 자신이 모르는 타자를 경계하면서 살아가기에 '도시'라는 물리적 환경은 그리 녹녹지 않다. '우리'를 포기하고 '나'를 선택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그 외 나머지 현상들은 개인적 관점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걸러낸다.
들뢰즈는 이러한 모습을 "노마디즘"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유목민적 삶이라는 의미인데, 우리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합집산을 하지 자신의 집단을 위한 영역을 구축하지 않는다. 유목민처럼 서로의 이해가 맞으면 모이고 그렇지 않으면 해체한다. 이렇게 집단 간의 경계가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는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또는 개인적 이유로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이나 '녹색당'을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지만. 기성세대는 '새누리당' 딱 하나다. 우리에게 정당이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곳을 '선택'하지만, 기성세대에게 정당이란 '우리'다. 지나친 일반화가 아닌가 모르겠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그렇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피로사회>의 이러한 사유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끊임없이 부정성을 제거하다 보니 우리에게 남은 것이 바로 '긍정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투명사회'는 곧 '긍정 사회'이다. 현대 신자본주의 사회는 '불가능'을 암시하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다. "YES, We can."이라는 구호가 사회 전체에 울려 퍼진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이 시대는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에, 개인의 실패는 개인의 무능으로 화살을 돌린다.
<피로사회>는 '우리'에서 '나'로의 변화하는 사회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투명사회>는 '나'로 변한 사회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긍정성'만 이야기해서는 현대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문화'이다. 사실 '긍정성'만으로는 이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긍정성'과 함께 '디지털 문화'가 가져다준 변화를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는 <투명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책을 사서 보신 분은 알겠지만 <투명사회>는 두 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투명사회'와 '무리 속에서 -디지털의 풍경'이 바로 이 두 에세이다. 투명사회의 긍정성에 대해서는 위에 장황하게 설명했으니 이제 '디지털 풍경'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실 '투명 사회'보다 '무리들 속에서 -디지털 풍경들'이 개인적으로 더 뛰어난 성찰을 담고 있는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투명사회>는 현시대의 사회적 풍경과 디지털이 가진 문화적 풍경을 한 프레임에 묶음으로서 설명 가능해진다.
스펙터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spectrare는 거리를 둔 배려와 존경 없이 관음증적 태도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존경은 공공성의 초석을 이룬다. 존경심이 사라지면 공공성도 무너진다.... 내밀한 영역이 공적으로 전시되고, 사적인 것이 공개된다.
아마도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 사회'에서 '스텍터클'에 대한 이야기를 한병철 씨가 가진 철학으로 다시 풀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글쓰기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야 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글은 글쓴이를 닮아간다. 특히나 숙련된 글쓴이라면 독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또한 조금씩은 통제가 가능하리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디지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을 무색하게 한다. 건축적으로는 '공적-사적 영역'을 물리적 경계에 기반하여 생각하고, 한병철 씨와 철학자들은 사회-심리적 경계를 통해서 구분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네 마을을 살펴보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기 쉽다. 우리네 마을의 구성은 매우 간단하다. 주변의 자연환경이 존재한다. 산과 들, 바다, 강, 태양 등 우리네 조상은 이런 것들을 고려해서 집의 방향을 결정한다. 각각의 가정이 집의 향을 설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향을 선택하지만, 조상의 묘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남향을 무시하기도 한다. 또는 귀양살이에 세속과 연을 끊으려는 양반은 집 터 자체를 지하로 끌어내리기도 하고, 자연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 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게 향을 정하고 집을 앉힐 터가 정해지면, 마을과 연결되는 길과, 손님을 맞이 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든다. 이렇게 우린는 집(사적 공간) - 마당 (반-사적, 반-공적 공간) - 길(공적 공간)로 구성된 하나의 마을을 살펴볼 수 있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양의 경우에는 집(사적 공간)-광장(공적공간)의 경계가 아주 뚜렷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참여나 철학이 강한 우리나라의 마을 구조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의 등장은 공간으로 구분되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스마트폰은 그 자체만으로 '반-사적, 반-공적'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사실 스마트폰이 '사적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사회적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급된지 대략 10년 정도가 되었고. 아직 우리는 인터넷상의 공공질서를 구축하지 못했다. 악플과 같은 문제도 사실, 우리는 인터넷이란 매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거 우리에게는 토론을 위해서라면, 마을 정자나, 마을의 광장을 이용하면 가능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의 아고라 Agora와 같은 실제적 공간이 부재하고, 인터넷이란 가상의 공간이 실제를 대체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공간을 사용하기 위한 '윤리'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러한 문제를 '익명성'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익명성'으로 설명하기엔 디지털 문화로 생긴 우리의 인식 변화는 너무나 거대하다고 생각하지만, 한병철 씨의 사유를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익명성'과 함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정보'이다.
앞서 말한 것을 정리해보면, 디지털의 풍경은 그 공간이 '공적 영역'인지 '사적 영역'인지 아직 정립되지 못했다. 그러한 성질을 결정하기 위한 사회적 함의나 공감대 또한 결여되어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익명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보'를 결합하면 꽤 다양한 사회학적 모습들이 펼쳐진다.
정보가 쌓여가고 더해져 가는 반면, 진리는 배제하고 선별한다. 진리는 정보와는 반대로 더미를 이루지 않는다.... 지식 역시 그냥 바깥에 보이도록 놓여 있지 않다. 지식은 정보처럼 밖에서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적 측면에서 지식은 매우 짧고 단기적인 정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또한 정보가 명시적이라면, 지식은 종종 함축적 형태를 취한다.
그에게 '정보'란 '지식' 또는 '진리'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Fact'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Fact'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Truth. 진리이다. 팩트는 모여서 입장을 만들 순 있지만. 그것이 진실을 대변할 순 없다. 팩트는 개인에 따라서 선별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디어의 역할은 중요하다. 미디어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팩트들을 나열하고, 개인에게 어떤 팩트를 선별할 것인지를 강요한다. 미디어의 탄압이란, 모든 객관적 팩트를 다 나열할 수 없도록 강압할 때 생겨난다.
우리는 객관적 팩트들을 선별하고, 하나의 지도를 구성할 수 있을 때 즈음. 지식 또는 지혜라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 단순한 팩트들을 나열해서는 그것은 더미 Dummy 밖에 안된다. 그것을 선별적으로 구성 가능하여야만 하나의 '지식' 또는 '진리'가 만들어진다. 팩트들 사이에 생략된 것들과 과장된 것들을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는 앞서 말한 '팩트'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디지털 공간'속에서 자신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정보를 만나게 된다. 지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구별해낼 것이다. 하지만 '정보'의 더미는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인터넷 웹페이지의 수많은 광고나 트래쉬 사이트들이 클릭을 요구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한 번의 클릭을 받기 위해서 더욱더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정보'를 사람들에게 노출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보'의 또 다른 하나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적 특성을 가진다.
좀 더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면. '정보'는 가볍다. 그리고 '익명성' 또한 가볍다.
프란츠 카프카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었다면. 분명히 '사비나'라는 인물을 떠올릴 것이다. 작가는 '사비나'에게 왜 가벼움이란 특성을 부여했을까? 사랑은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 사랑뿐만 아니라 우정이나 존경 같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감정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의 부재는 인간 존재를 가볍게 만든다. '정보'와 '익명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보'와 '익명성'에는 '관계'가 부재한다. 그것들은 매우 일방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조각들이 다 모였다. '익명성'으로 대표되는 '공적-사적 영역'과 '정보'로 대표되는 '팩트'와 '이미지'. 그리고 이들이 가지는 '일방향적 특성'. 이것들이 서로 연관되면서 디지털 풍경은 만들어진다.
'정보'가 가지는 가벼움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정보'를 생산 가능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전환은 '정보'의 확대/재생산에 이바지한다. 수많은 '카더라 통신'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떤 '정보'의 집합체이다. 이 더미 Dummy들이 뭉쳐서 어느 순간 '카더라 통신'은 '진실'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카더라 통신'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정보'들 보다 자극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지 않을 것이니까.
그래서 '성의 상품화'는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는 프로세스이다. 어디에서 많이 본 풍경 아닌가? <1984>에서 한 번 본듯한 풍경이다. 그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문화는 개인으로 하여금 사유를 위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감각'. 아 오해하지 말자. 나는 '1984'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의 풍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확히. 그리고 1948년에 한 작가는 60년 후의 세상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쯤 되면 지금까지 무엇을 설명하려 했는지 어지러울 수 있으니,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자.
지금 사회 환경은 '집단'보다 '개인'중심의 환경이다. 디지털 안에서 모인 사람들은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집단'이라기보다 '무리'에 가까운 행동방식을 보여준다. '익명성' 아래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느끼지도, 타인에게 신뢰를 느끼지도 않는다.
이 '무리'는 쉽게 분노하고, 쉽게 가라앉는다. 그들의 분노는 자신에게 올 피해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된다. 오히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자신과 무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분노는 쉽게 가라 않는다. 그들의 분노는 지적인 성찰에서 비롯되는 화 Anger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다. 뭐 어렵게 말할 거 없다. 가볍다. 그들의 분노는 너무나 가볍다.
우리는 스스로를 상품화시킨다. Facebook에는 자신의 Face를 전시하고, 상품화한다. '나'라는 인물과 전시된 Face는 다르다. 현실 속에 나는 그렇게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예쁜 Face나 Body를 전시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스스로를 전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본다. 생산자로서 일방향성은, 이렇게 나타난다. 좀 더 지적으로 표현하자면. 타인의 시선의 부재에 익숙해진다. 타인과의 만남을 배제하면, 전시된 Face는 자신을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는 나르시시즘적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자극적 순환은 개인으로 하여금 여유를 뺐는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유'하는 시간을 뺏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병철에게 '부정성'이란, '생산적이지 않는 시간'과도 연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일 하지 않는 날'을 '휴일'이라고 부른다. 그는 '휴일'이라는 단어에서, '일 하기 위한 휴식시간'을 읽어낸다. 우리는 '일하기 위한 휴식'과 '휴식'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용들은, 디지털 파놉티콘을 만들어낸다. 스스로가 자신의 정보를 전시하고, 판매함으로써, 우리는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어 있다. 이미 중국에서 우리의 신상이 한 사람당 10원에 팔리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지만, 저 사람은 나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이 극에 달 하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검열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투명사회란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그림자'가 없는, '빛'은 있지만 '빛나지 않는' 사회다. '빛'은 필연적으로 굴절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빛이 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굴절'이라는 부정적 과정을 또한 제거됨으로써 '빛'만 존재하고 '빛나지 않는' 사회. 이것을 한병철은 투명사회라고 이야기한다. 굴절이 없다는 것은 그 물체가 투명하다는 것이니까.
끊임없이 부정성을 제거하는 것. 이것이 투명사회의 시작이다.
시간, 거리, 방향, 다의성 등 이러한 것들의 부정성을 제거한다. 사건의 시간적 나열에서 공백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고, 타자와의 거리를 제거하고, 부정적 감정을 제거하고, 방향을 제거하고, 감춰져 있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투명사회는 만들어진다. 모든 것은 '긍정성'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명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한 야구 커뮤니티에서 '이종범'선수에 대한 평가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에겐 성적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는 것. 성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그는 타이거즈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을까. 아니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선배였을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조롱하면서 'Something Invisible'이라고 이종범 선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외야 수비를 하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힐 때면, '왜 갑자기 공이 사라지냐'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현대 야구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이 지표화 되어있고, 그것은 곧 선 수 개인의 커리어로 나타낸다. 이런 것들을 수치화하고 계산하는 것을 '세이버 메트릭스'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통해서 각각의 선수에게 가치를 매기고. 가치 있는 선수인지, 아니면 쓸모없는 선수인지를 구별한다. 세이버 매트릭스는 현재의 가치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과거에 어떠한 유형의 선수였는지를 보여준다.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성'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프로야구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성적은, 그 선수를 기용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 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 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 오늘날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고 있는 실증적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가 이론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데이터의 비교가 이론적 모델을 대체할 것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언젠가 만화작가 최규석의 단편집 <습지 생활 보고서> 만화의 뒤편에 작가의 말에서. 자신은 지금까지 동어반복을 싫어해서 항상 새로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내 잊히는 에피소드들을 보며,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동어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세삼스럽게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부정성의 제거. 그러니까 긍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의미'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대부분 '의미'라는 것은 메타포로 존재하며, 상징적으로나, 다의적으로나 표현되기 마련인데. 대부분 명료하지 않을뿐더러,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투명사회는 이러한 여지를 제거한다. 무엇이든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자극적인 '정보'의 특성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메시지는. 쉽게 잊히고, 다시 읽히지 않는다. 또는 그 이면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를 이 사회는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연출되는 미장센이 제거된다. 자극적 정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감독이 의도한 '미장센'을 이해하지 못하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팝콘 영화'란 미장센을 최대한 제거하고, 영상적 아름다움만 강조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영화관을 가득 채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태의 극점은 어디인가? 포르노 Porno이다. 여성의 신체는 매우 아름다운 피사체이자, 객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체가 아름답게 표현되기 위해서, 아름다운 몸을 가지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누드 크로키나 흑백사진에서 여성의 신체는 아름답게 연출된다. 이를 위해서 빛과 그림자가 이용되기도 하고, 대략적인 실루엣만 그려냄으로써, 보지 못하는 부분을 상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포르노는 야햐지 않는 것 같다. 포르노는 욕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할 뿐이다. 누구도 포르노를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다. 포르노에는 모든 의미와 미장센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도구는 목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고 달려든다. 반면 기품에는 뭔가 굽은 것, 우회적인 것이 내제 한다.... 따라서 기품은 목적 지향적 작전과 외설적인 벌거벗음 사이에 위치한다.
디지털 사회에서 Face는 하나의 '정보'처럼 취급되며, 이미지로의 특성을 가진 바 있다. Face는 아우라 Aura가 제거되어 있다. 이는 Face가 하나의 전시상품으로써 가치가 매겨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 정찰 표를 붙임으로서 아우라를 제거한다. 우리의 얼굴에는 가치가 매겨진다. 그리고 디지털 풍경이 현실과 겹쳐질 때, 우리는 하나의 상품이 된다. 스펙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스스로 가격을 매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정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스펙이 없는 정찰 표에????라는 가격이 달린 제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큰 모험이 뒤따른다. 물론 이는 정확한 가격이 붙어있는 제품에도 다를 바 없지만, 정확한 가격을 아는 제품은 구매해보고 맘에 안 들면 교환이나 환불을 하면 된다. 하지만 '?'는 구매하기 매우 망설여진다. 아니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 저기에 상품의 질을 증명할 수 있는 가격이 붙은 제품을 사는 것이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다. 그렇게 '?'가 달린 모든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가격을 매기기 시작한다. 가격을 매겨놓으면, 어느 누군가는 사가기 마련이니까. 사회는 개개인에게 가시적이고 명료한 가격을 매기기를 요구한다.
이는 개인, 장소, 집단에 서사성을 제거한다. 너무나 명료한 가치체계. 프로세스는 서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계산과는 반대로 사유는 자신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 공간으로 나아간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라는 어떤 취업컨설턴트의 이야기는. '서사'를 상품화시킴으로써, '서사'가 가지는 미확정적인, 피상적인 이야기를 제거한다. 그들에게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부정성을 최대한 제거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디지털 매체는 '거리'를 제거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든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때때로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 '타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보여주고 싶은 부분, 즉 '타인'의 단편만을 보여준다.
가까움은 풍부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데, 거리의 소멸은 풍부한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까움 속에는 멂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가까움은 넓다. 하이데거는 “멂을 견뎌내는 순수한 가까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멂의 가까움의 고통”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부정성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거리 화하여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될듯하면서도 설명하자니 까다로운 문단이다. '타자'와 나 사이의 넓은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타자와의 이러한 관계는. [Vision - eyes of skin]이라는 심리-건축학 저서를 보면, 우리에게 시각은 가장 먼 사물을 인지할 수 있다. 시각 > 청각 > 후각 > 촉각 순서로 우리는 먼 곳의 사물에서 가까운 사물을 인지한다. 좋은 건축이란 이러한 감각을 다채롭게 이용할 수 있는 건축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디지털 매체에서 '타자'는 이러한 위계도 없고, 멂과 가까움이라는 거리가 제거되어 있어서. 언뜻 너무 가까이 다가온 거 같기도 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은 일정한 거리가 유지될 때, 더 친밀해질 수 있다. 심리적으로 타자가 가까워질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시각으로만 바라보던 사람이 익숙해지고, 말소리가 들리만큼 좀 더 가까워지고. 그 사람이 가진 특유의 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또는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가지만. 하지만 거리가 사라진 타자와 나의 관계에 '거리 없음'은 계속해서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힘쓰게 하고, 관계는 피로감을 더해간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의 매체인 디지털 네트워크는 어떤 도덕적 명령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완전한 조명은 최대한의 착취를 약속한다.
우리는 투명사회가 가진 사회적, 개인적 삶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의 영역일 것이다. 이 부분은 저자의 <심리 정치>에서 좀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다. <투명사회>는 폭로. 패놉티콘적 사회를 가속한다. 페이스북을 가득 채운 XX녀, XX 남은 개인의 행동을 적날 하게 밝혀낸다. 어쩌면 지금 사회는 '검사'나 '국정원'보다 '네티즌 수사대'가 더 무서운 사회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JBTC 뉴스에서 민간 잡수사가 구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인터뷰한 홍 XX 씨가 논란에 중심에 선 후로. 네티즌 수사대는 그녀가 '관동 대지진'의 피해자 유학생으로 등장한 것과 어떤 보이그룹의 팬으로 인터뷰한 것들을 속속들이 밝혀냈다. 그녀의 거짓말이 하나 둘 씩 밝혀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소름 돋는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신상 털기'는 개인적 정보가 디지털 풍경에서 얼마나 간편하고, 쉽게 밝혀질 수 있으며. 다루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행위를 강요하는 유요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병철은 이것을 디지털 파놉티콘이라고 이야기한다.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 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지가 덧붙여지지 않는 글을 오랜만에 써보네요.
썼다기엔 이전에 썼던 글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한 글에 가깝지만요.
그래도 이미지와 글로 이해되는 글이 아닌,
오로지 텍스트로 이해되는 글을 쓰는 것은 오랜만이라
꽤 재미있었네요.
지금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는 책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듯합니다.
다 써놓고 보니, 글의 호흡이 그리 긴 편은 아닌 거 같네요.
뭐. 다음에 다시 한 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